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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16 Slingstones —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

SL!NGstones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

임찬순 목사 [email protected]
성누가연합감리교회 TX

교회는 하늘의 제도이나 사람들의 모임이기도 하다. 그 긴장과 이상을 동시에 잡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주님을 믿고 사랑의 길로 가면 상처가 아물고 작품이 되어 나오는 세계가 열리지 않겠는가?

교회를 이루고 보존하는 목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얽히고설킨 인연의 고리 속에서 하늘의 세계를 구현해내는 불가능의 예술이다. 그런 과정에서 상처는 현실이고 교회의 건강과 본질을 이야기하려면 진솔하게 펼쳐 보이는 수밖에 없다. 교회를 평생 떠나지 않고 살았지만, 목회의 본질이 뜨겁게 다가온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무한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가정과 교회의 사랑 속에서 자란 나는 교회를 이상적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가난하게 자라면서도 가난의 실재에 눈뜨기보다는 사랑받은 힘으로 가난의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때로 교회 속에서 자란 목회자들은 목회와 교회의 현실에 둔감하고 이상적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목회의 본질은 성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선악의 대결, 알파에서 오메가로의 종말론적 전진이다. 그것을 위해 교회는 존재한다. 교회에선 선악의 대결이 이뤄지기에, 착한 목사는 실패하는 것이 정석이다. 초등학교 선생이나 하면 된다는 선배 목사의 일갈이다. 교회의 상처는 보편적인 교회 현실의 단면이다. 목회자는 이 상처를 안고 싸매고 치유하고 때론 수술하고 집도해야 한다. 상처와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그 난폭한 힘에 밀려 교회를 떠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치유자의 역할을 하는 운명인가 보다. 헨리 나우웬은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는 말로 이런 세계를 조명했지만, 그것은 기독교 영성의 오랜 전승의 지혜였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과정은 상처 많은 영혼의 아우성을 치유하는 과정이다. 현상에 파묻히지 않고 희망을 노래하고 미래를 열어갈 수 있기에 교회에는 영광이 있고 빛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 영광과 빛의 이면에는 죽고 사는 수많은 사건이 반복된다. 바로 그런 현실에서 상처는 실재이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고 이루어가는 것이 목회의 참모습이리라.


1. 목회자는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이다.

15년 전 한국에서 기도를 많이 하는 분이 오셨다. 건물이 무너져 돌들이 떨어졌는데 다행히 내가 별 피해를 보지 않는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셨다. 세월이 지난 다음 내 목회 여정이 그랬다는 생각을 한다. 예수님도 뱀처럼 지혜롭기를 요구하셨지만, 비둘기의 순결함을 지키라고 하셨다. 주님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그 길을 자기희생을 통해 당당히 가셨다. 목회자는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여야 한다. 영적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그것이 전쟁의 현실에서 품을 수 있는 희망이다. 이것을 얼마나 실감하고 깨닫느냐가 목회의 질과 특징을 결정한다. 교회를 낭만적으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접어야 한다. 성서적 현실에 눈떠야 한다. 목회가 위치한 자리인 역사와 현실의 장은 언제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현실에 눈뜨고 자신의 한계와 역할을 정확하게 보게 될 때만 진정으로 하늘을 의지하게 된다. 목회자는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다. 자기를 희생하고 하늘을 의지하는 길을 가야 한다. 이것들은 영적 전사에게는 분리될 수 없는 현실이다.


2. 상처를 아물고 귀한 작품인 교회를 만든다.

목회는 역설이 드러나는 현장으로, 상처를 피할 수 없다면 당당하게 맞을 일이다. 내가 해결하려 하면 꼬이고 덧나기가 쉽다. 상처는 아물고 나으면 옹이가 된다. 옹이는 빛나는 아름다움을 가진 작품을 만든다. 그렇다면 상처는 옹이를 만들기 위한 필연의 과정이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상처는 신앙의 용사를 키우고 신앙의 영웅을 만드는 과정이다. 상처를 통해서 교회는 치유되고 건강해지는 법이다. 주님이, 성령이 하신다. 목회자가 져야 하는 상처는 바로 십자가이다. 신앙의 공동체에서 겪는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면 빛나는 인격과 신앙을 가진 이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단기적 관점이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상처는 옹이를 만들고 그 옹이가 아름다운 작품의 나무를 만들듯이, 상처는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원인이고 계기이다. 그렇지만,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 받은 신앙의 영웅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 교회는 새로워진다.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은 상처를 낫게 하고 치유를 경험케 한다. 잘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일하는 성령의 신비에 눈뜰 때, 우리는 귀한 작품인 교회를 보게 된다. 교회는 상처를 치유 받은 이들이 이루어내는 새로운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귀한 작품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이미 귀하게 만들어진 작품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만드는 과정이다.


3.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들어준다.

교회는 상처가 많지만 강한 공동체로 역사 속에 아직 살아남아 있다. 본질에서 주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는 조직이다. 상처는 싸매고 처방을 한다고 하지만, 본질은 저절로 낫는다. 자연의 치유력, 몸속에서 있는 생명의 힘이 고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외적인 임시처방일 뿐이다. 그 속에 생명력이 없으면 나을 수 없다. 상처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성령의 능력을 맛봐야 한다. 관상적 태도(contemplative stance)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들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상처는 하늘을 의지하고 성령을 의지하게 하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조건일 뿐이다. 처음 텍사스에 왔을 때 들어주고 들어주고 두세 시간을 계속 들어준 적도 있었다. 그런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듣겠는가? 요새 듣기보다는 말하고 고쳐주고자 하는 의욕이 강해진다. 위험한 시기가 아닐까?


4. 허허실실에 사랑의 에너지를 담는다.

조급하거나 속내를 쉽게 내비친다면, 목회자 또한 상처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그런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목회자는 관상적 영성가가 되어야 하는가 보다! 영적인 지각력으로 파악하고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이겨야 한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허허실실이 아닐까? 임기응변의 머리 굴림에서 나오는 허허실실이 아니라 어디서 나서 어디로 부는지 알 수 없는 바람으로의 성령이 드러나는 모습의 허허실실 말이다. 허허실실에 사랑의 에너지의 진정성을 담을 수 있다면, 새로운 리더십이 생길 것이다.

영성의 길에서 아포패딕(apophatic)과 카타패딕(kataphatic)을 구분하는데, 허허실실이 부정(via negativa)의 자세라면 사랑의 힘을 믿고 전진함은 긍정(via affirmativa)의 길이다. 결국, 사랑이 구원하고 사랑만이 살려내고 치유한다. 사랑은 고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종합적 행위다. 전쟁이기에 목회의 현장에서는 수많은 부상자가 생긴다. 목회자는 야전사령관이며 군의관이다. 싸매고 약을 바르지만, 살리는 것은 위에서 한다. 내가 뭔가를 하려고 하는 자세를 놓고 위에 전적으로 맡기는 길이 사랑의 길이 아닐까? 내가 하려고 하면, 늘 실수와 강박이 따른다. 주님을 믿고 사랑의 길로 가면 상처가 아물고 작품이 되어서 나오는 세계가 열리지 않겠는가? 오늘도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고 싶다. 교회는 하늘의 제도이나 사람들의 모임이기도 하다. 그 긴장과 이상을 동시에 잡는 것은 우리가 가야 할 아직 가지 않은 길인가 보다.


5. 기도의 힘에 기대서 간다.

상처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요인이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다. 외부적 요인 때문에 일어나지만, 우리는 상처를 받으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선 외부를 원망하고 불평하고 자책한다. “네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네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 15:7). 기도의 힘은 상처를 자연스럽게 아물게 한다. 내면이 강해져서 외부의 요인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경지가 열려야 한다. 바보의 길인지 거룩의 길인지?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라고 했던 옛 어른들의 고언이 억압적 언사가 아니라 최선의 지혜가 아닐까? 사회과학적 분석과 치유의 방법론이 별것인가? 엎드려서 기도하면서 위에서 부어지는 힘에 기대는 것이 지름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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