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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ching toward Community beyond Conflict: Reflecting the 500th Anniversary of The Reformation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며: 갈등을 넘어 공생(Gemein-schaft)으로
이은재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

16세기에 마주쳤던 우울했던 시대 상황에 대해 종교개혁은 부정적인 절망이나 막연한 희망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개혁은 우리 시대의 교회와 신자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용기를 이야기해준다.

들어가면서

개신교인들에게 10월 31일은 상징적인 날짜이다. 루터가 중세의 관행이었던 면벌(免罰)에 반대해서 저 유명한 95개 조항을 게시한 사건은 모든 종교개혁 진영에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누구도 종교개혁이 만들어졌다거나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종교개혁은 역사의 열매이며, 당시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관심사와 결부된 다양한 사건들 그리고 해당자들의 협력으로 발생한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은 복음과 그 핵심 메시지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시해 주었다. 즉 하나님은 사람과 거래하지 않으신다. 복음을 사고파는 행위는 근절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이시며 인간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의롭게 만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근본적인 재발견은 교회와 유럽, 더 나아가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500년이 흐른 지금, 교회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교회와 세계를 위해 복음의 핵심은 무엇이며, 무엇이 복음을 결정하는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는 16세기와 달리 오늘날 교회와 세계가 이제는 한 쌍의 건물이 아니며 많은 것을 공유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과 더불어 교회의 개혁들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 연합과 일치를 꾀하였던 종교개혁은 오히려 교회의 가시적인 일치를 분열시켰다. 1555년 9월 25일 체결된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약은 ‘군주가 자기 지역의 종교를 결정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고 선언했다. 종파 간의 갈등을 봉합하려고 시도했던 본래의 의도와 달리 이 결정은 나폴레옹 시대에 해체될 때까지 효력을 발휘함으로써 교파분열의 고착화를 가져왔다고 평가된다. 결국, 이런 시각들로 인해 종교개혁은 교회의 일치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종교개혁 기념일은 종교개혁 진영의 관점에서 거행되는데, 실상은 교회의 분열을 자인하는 것이므로 축하할 일이 아니라는 반론이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물어야 마땅하다. 진정 교회의 일치는 어떤 이해를 바탕으로 기념될 수 있는가?

종교개혁에 묻다

종교개혁의 발견이 오늘의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여전히 그 풍성함과 위대함을 발산하기 위해서 기독교의 복음에 대한 개신교의 증언은 강화되어야 한다. 즉, 복음 안에서 개신교의 일치를 요청하면서도 그 풍부한 다양성과 가치를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교회들 사이에 협동과 동등함을 통해 기회를 열어가야 한다. 전 세계의 개신교회는 국제적인 지평을 제시해야 하며, 이를 위해 종교개혁의 여러 차원인 민족적이고 정치적이며 문화적이고 시민적인 방향을 올바르게 부각해야 한다. 새로 오는 젊은 세대를 향해 개방하고 공동체의 생명력을 소중하게 주장하며,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에 맞서 기부와 연대의 윤리를 요청해야 한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종교개혁은 교회와 국가 그리고 사회에 대한 연속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이상(理想)은 두려움을 확장시켰고, 전통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방향감각을 빼앗아버렸다. 반면에 종교개혁의 ‘신학적이고 교회적이며 영혼을 돌보는 해방의 잠재력’(Berndt Hamm)은 “새로운 신앙”을 획득하도록 설득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한 해방의 영성은 오늘에도 분명 도움이 될 수 있다. 현대인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방향 상실의 위기를 겪고 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복음의 메시지를 형성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통해 자유롭게 될 것인가에 달려있다.

우선 종교개혁자들의 말 가운데 청취할만한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 삶의 성공과 인생의 한계를 넘어서는 성취는 개인의 공로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선사되는 믿음의 의에 달려있다.
  • 신구약 전체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유일하고 충분한 원천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서 자체를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으며, 다른 기독교인들과의 교제 안에서 성경의 가르침은 더욱 풍성하다.
  • 복음적이라 함은 신앙의 자유로부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는 기독교 신앙의 척추와 같다. 자유는 공동체 안에서의 삶과 같이 연합된 자유이며, 그런 점에서 근대 이후 현대인의 자유 개념과 구별된다. 근대인은 개인으로서의 자유만을 의미한다.
  • 기쁜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감사란 필연적으로 동료(인간)에 대해 책임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올바른 행위와 인식을 동반한다.
  • 복음적인 신앙에 따르면 교회의 원형(原型)은 구체적으로 드러난 공동체로 인식한다.
  • 신앙은 개인적이거나 사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공동체적이지 않은 신앙은 결코 교회론에 해당하지 않으며 사회 안에서 교회의 제 역할도 감당할 수 없다.
  • 복음적인 신앙이란 일상의 삶에서 예배를 경험하며 소명의식을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 결국, 복음적인 신앙은 맹목적이지 않고 비평적이다. 예를 들어 교파주의, 종교전쟁, 세속화, 재세례파 박해 같은 종교개혁의 부정적인 결과들은 이런 태도를 반영한 것이다.


분명히 종교개혁의 메시지는 도전적이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삶의 정황과 각양각색의 사람들 가운데서 종교개혁을 접하게 되기에 다음의 몇 가지를 고려해보지 않을 수 없다.

  • 종교개혁은 철저히 중세라고 불리는 종교적으로 각인된 세계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세속화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자신의 의를 구할 수 있을까?
  • 종교개혁은 제일세계라 불리는 기독교 독점문화권에서 발생했다. 반면 종교적인 다원주의는 오늘날 교회에 거대한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 현대인들이 해방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이는 우리의 교회에 커다란 도전이 된다.
  • 오늘날 신앙은 영적이며 추상(관념)적이다. 과거와 같은 신앙의 중재 형태는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 한편으로 성서 전통과의 단절, 다른 한편으로 성서 본문과 하나님의 말씀을 근본적으로 동일시하는데 직면해서 교회가 어떻게 성서 본문을 새롭게 인식하고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 오늘날 효과적인 소통전략과 소통수단은 무엇인가?
  • 기독교 신앙은 교회(신앙공동체) 없이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도 홀로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가? 교회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도달하는 공간으로써 신앙을 형성하고 자라게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는가?
  • 예배는 이를 통해 기독교 공동체가 살아가는 중심축이기에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또한, 예배의 일부분으로써 설교와 성례전도 마찬가지이다.
  •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정치적 질서에 대한 요구가 새롭게 논의되어야 한다.
  • 상대적이고 교리적인 다원주의가 임의성에 빠지지 않도록, 교회론에 대한 교리적 입장과 실천이 구속력을 상실한 지금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 결국,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는 다음과 같이 공동으로 물어야 한다. 복음의 가치와 의미가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서 어떻게 증언될 수 있는가?


종교개혁의 남겨진 과제

1. 어떻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경험할 것인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통찰은 개신교도들에게 언제나 새롭게 획득되었다. 세계사적인 지평에서 볼 때, 신앙의 실재에 관한 루터의 물음은 그 신학적인 토대에서 발견된다. 무엇이 “종교개혁(적)인지” 분명해지려면 신학적인 책임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루터에게서 밝혀진 신앙의 급진성과 차이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사태는 바르게 전개될 수 없을 것이다. 루터의 현실성과 폭발력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즉 거룩한 책으로 입증되는 성경은 ‘노르마 노르만스’(‘norma normans’ 규범 시켜주는 규범, norma absoluta, norma causativa)이고, 교리나 신조는 ‘노르마 노르마타’(‘norma normata’ 규범 되는 규범)이다. 성경의 메시지는 죄인(구원의 문제에 한없이 무기력한 인간)에 대한 놀라운 사랑의 언어이며 은혜의 선언이다. 복음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양심의 자유와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경험하게 된다. 중세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무기력한 인간은 십자가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영광의 주(고린도전서 2:8)를 만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어진 자유의 위로를 그분의 고유한 말씀으로 존중하며, 사죄와 용서의 가르침을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절대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를 통해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고히 믿을 각오가 되어있는가? 이것이 첫 발걸음이다.

2. 모든 사람은 거룩한 사역자이다.

만인사제직 혹은 평신도사제직으로 잘 알려진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의 직분은 기능상의 차이인 동시에 은혜에 합당한 책임적인 응답이다. 이를 위해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는 모국어 성경의 번역, 함께 부를 수 있는 찬송, 더불어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의 배치가 이루어졌다. 모든 신자는 세례와 성찬에서 동등함과 일치됨을 경험하고, 직업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거룩한 부르심으로 결단하게 된다. 비록 이 가르침은 경건주의와 감리교운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되어 왔으면서도 여전히 불평등 사회의 단면으로 남아있다. 현대에 존재하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계급과 차별은 교회의 공동체성을 위협하고 있다. 교회의 보편성은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을”(디모데전서 2:1) 위한 중보기도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이 관철되어야 한다. 즉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과 입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한다면, 그리고 세상에서 손과 발로 낯선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간다면, 비로소 교회의 예전은 이웃과 세상을 향한 사역에 상응하는 것이 된다. 이 모든 사역에 신자 개개인은 아무도 예외일 수 없다는 사실이 종교개혁에서 밝혀졌다.

3.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분법적 장벽은 허물어져야 한다.

교회(ecclesia)는 ‘밖으로 불러 성별된 이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교회로 부르심은 차이와 구별에 머물지 않는다.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이나 예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던 이들은 세상을 벗어나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르심은 세상을 위한 사역의 훈련에 해당한다. 교회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비난을 받는다는 말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다. 삶의 기준과 원칙이 달라서 공격을 받는 것이라면 도리어 기독교가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세상에서 더는 기대와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이다. 고립된 기독교, 무기력한 그리스도인들의 배경에는 그동안 교회가 세상과 사회에 등을 돌린 결과이다. 현실 세계에 실질적으로 적용하지 못하면서 마치 그런 모습이 초연함이나 고상함, 심지어는 내세 지향성이라는 이름 아래 계속해서 도망쳤다. 그런데도 여전히 영성을 내세워 세상과 차별화하는 것만이 생존방식이란 말인가? 기독교의 긴장(緊張)은 현실에 바탕을 두지만, 멈추거나 그대로 있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갈 때 일어난다. 전통의 가치와 크기는 단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전승을 서로 연관시킬 때 발생한다. 즉 현실의 세계에 두 발을 내딛지 않으면 힘을 쓸 수 없다. 말씀이 삶의 자리에서 선포되지 않는 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4. 종교개혁의 영성은 참으로 거룩한 삶이다.

하나님 말씀의 가치와 효력은 “사람의 품위에 종속되거나 귀속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을 받고 수용하는 자들에게 달린 것도 아니다”(nec pendere ex dignitate ministri aut sumentis). 그래서 주일은 하나님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쁘고 즐거운 날이었고, 신자들은 자신을 거룩하고 구원받은 백성들로 그리고 이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연합된 공동체로 간주했다. 현대인들에게 거룩이나 신성화라는 단어는 낯설고 어설프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현대적이고 문명적일수록 더욱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는 단 한 번도 이 과제를 잊은 적이 없었다. 진정한 영성은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영적 시련”(tentatio)은 말씀과 기도 가운데 삶을 위한 노동의 자리를 잊지 않았으며, 노동 중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했던 태도이다. 반면에 세속화된 세계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개인을 추구하면서도 스스로 집단화되는 경향이 있다. 대량생산물처럼 집단화된 개인은 적합성, 효용성, 상업성만을 요청받는다. 결국, 인간의 자기소외는 자신을 상품화시킨 결과이다. 거룩과 신성화는 인간의 재형성 혹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이라는 관점에서 재고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나가면서

시인 이육사는 “광야”라는 시(詩) 제4연에서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라고 노래했다. 조국의 암울한 현실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해방과 광복을 염원하며 씨앗을 뿌리노라는 시인의 노래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의식이 되어야 한다. 광야는 현실의 부정이 아니라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현실을 넘어서도록 하기 때문에 광야의 상실은 곧 기독교의 죽음을 의미한다. 현실을 벗어나서는 결코 그 어떤 광야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여! 갈등과 분노와 폭력이 난무하는 위험사회로 돌아오라. 어떠한 종교도 현실 세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제시할 수 없다. 복음의 자리는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곳이며, 상처와 고통이 수반된 현재이다. 아첨과 비겁, 기만과 술수로 쌓아 올린 몰렉의 숭배, 음란과 색욕의 난장판이 된 바알과 아세라 찬양, 삶을 기꺼이 돈의 노예로 헌정한 맘몬의 세계에서 기독교는 더는 모르핀과 향수를 남용하지 않아야 한다. 십자가 없는 복음을 생각하지 않기. 그것이 광야를 살아가야 하는 동시에 회복하는 유일한 방도이다. 16세기에 마주쳤던 우울했던 시대 상황에 대해 종교개혁은 부정적인 절망이나 막연한 희망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개혁은 우리 시대의 교회와 신자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용기를 이야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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