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Equipping Leaders Korean 양극화 시대의 목회, 어떻게 할 것인가?

양극화 시대의 목회, 어떻게 할 것인가?

By Sang-Won Doh

Stock Woman praying alone 72px

세계적으로 양극화 현상은 점점 더 심화하여지다 못해 파국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한국은 세대 간의 갈등이 지역 간의 갈등보다 훨씬 심해졌다. 미국에서 지역적, 세대적, 인종적 갈등과 정치적 이념의 양극화는 지난 팬데믹 기간 동안 폭발적으로 심화하였다. 사회학자들은 시민전쟁이 일어났던 1840년대에서 1860년대만큼 미국 사회의 양극화는 심각해졌으며 시민전쟁의 가능성까지도 조심스레 전망하고 있다. 변화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미 연합감리교회 교단도 양극화의 길을 걷다가 나누어지는 것이 낫겠다고 협의한 것이 해결책으로 간주하는 상황이다. 안타깝게도 이민 한인교회들은 이 전쟁과 같은 상황을 최전선에서 심각하게 겪어내고 있다. 이 양극화 현상과 교회와 교단의 분리는 약간의 예외는 있을 수 있지만, 큰 시각에서 볼 때 미국의 정치적 문화적 양극화를 배경으로 이뤄지고 있다. 교회는 사회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가? 과연 교회는 사회를 치유하고 통합할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양극화 시대를 살아 내는 교회와 그 지도자들과 함께 교회의 본질적 요소, 공교회성(catholicity)을 기준 원칙으로 하여 몇 가지 제안을 나눈다.

우리는 세상의 양극화라는 배경 때문에 교회도 분열을 겪는 사실에 크게 아파해야 할 것이다.

1. 양극화의 논리에 빠져들지 말라.

15년간 이민 한인교회 목회를 하면서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보다 외면만 유사할 뿐이지 여러 다른 부족이 모여 산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 이민 한인교회 주축을 이루는 60대와 70대, 그들과는 정치적 지지 성향이 전혀 다르고 헌신이 약한 40대와 50대, 그리고 이들의 양립화를 공감하지 못하는 또 다른 그룹들, 즉 1.5세대와 2세대들 혹은 다인종 결혼 가정으로 한 교회가 나뉘었다. 정서와 역사적 경험과 이해가 다른 부족들이 불편하게 동거하는 듯한 느낌이 자주 들었다. 소속감과 효율성이라는 명목하에 세대별 목회를 지향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이민 초기 세대의 교회에 대한 애틋하고 정성된 마음이 세대 간에 전달되지 않아 안타까웠다. 지난 30~40년을 교회 주방에서 일했던 60대와 70대가 여전히 주방에서 일하고 있고, 30~40대는 편히 밥을 받아먹는 광경은 다른 부족들이 한우리에 모여 사는 우스꽝스러운 단편이었다.

더군다나 교회가 갈등을 겪게 되면 놀랍게도 빠른 속도로 전선이 구성되어 남과 북이 싸우듯이 싸우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될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과 북이 기적적으로 건강하게 통일이 되고 그것이 한민족의 집단 무의식에 뿌리 깊게 자리를 잡아야만 그제야 이민 한인교회 내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는 현상이 사라지지 않을까 묵상해 본 적이 있다. 한편으로는 나와 같은 세계관과 경험을 가진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함께 정치적 색깔을 부담 없이 표현하며 눈치 안 보고 목회하고 싶은 유혹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목회자가 한쪽에 치우쳐 다른 쪽을 평가하거나 밀어내는 목회를 했다고 한다면 교회는 반 조각 혹은 산산이 조각나버렸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목회자가 조급해지거나 그 내면이 모순을 넉넉하게 품을 수 없다면 공동체는 결국에는 목회자의 내면세계를 반영하게 된다. 그러면 왜 이렇게 다른 부족들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2. 교회의 정체성을 기억하라.

교회의 정체성은 세례 의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세례를 통하여 세상에서 우리를 규정하였던 모든 요소를 배설물처럼 버리며 예수의 제자로서의 정체성에 가장 큰 무게를 둘 것을 우리는 믿고 있으며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며 모두가 계급, 인종, 민족을 뛰어넘어 서로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를 규정하는 세상의 힘이 무력화되었음을 믿기 때문에 가능하다. 돈이 있다고, 학벌이 좋다고 잘난 척하는 것이 교회에서 지양되어야 함은 물론이요, 출신 지역이 어디라고 사람을 범주화하는 것은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는 한 금지되어야 한다. 정치적 성향의 문제로 인해 교회에서 논쟁하거나 상대방을 범주화하는 일도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서적 원칙에 따라 성립된 교회의 교회 됨이 우리 가운데에 너무 당연해서 희미해질 때 세상의 양극화로 인한 갈등은 교회 안에 여과 없이 들어오게 된다. 교회는 세례에 의한 새로운 정체성 때문에 세계 역사 최초로 다인종, 다문화, 다민족, 다계급 공동체라는 이상주의적 공동체를 목적으로 두고 성장한 종교가 아니었던가?

3. 다름이 인정되지 않는 문화를 성경의 모티브로 재평가하라.

몇 년 사이 한국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는 끝없이 오르고 있다. 한국 사람으로서 어리둥절할 정도이며 감탄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한국 사람이 특별하다는 왜곡된 선민사상이 자리 잡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아시아인들이 차별당했기 때문에 열심히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나 우리 안의 타인에 대한 배려는 어느 정도로 성숙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연합감리교회 내에 다인종을 섬기는 사역자(대부분 1세)가 약 550명 정도 되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이민 한인교회에 한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타인종 목회자가 파송되면 그들을 한인공동체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이즈가 제법 되는 한인교회에 여성 목회자가 파송될 수 있을까? 2세들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감리사로서 파송에 참여하면서 제일 힘든 일 중의 하나가 2세 목회자를 찾는 일이다. 기준이 너무 높다. 백인 남성이라면 혹시 가능성이 있겠지만, 그 외의 다른 인종 혹은 심지어 1세들 중에 영어를 제법 하는 사람들도 가능성이 희박하다. 머리로는 알겠지만, 우리의 정서상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하며, 혹은 성공적 목회라는 명목하에 다름이 인정되지 않는 문화를 다 덮어버리면 과연 괜찮은 일일까? 나 자신도 결코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이민 한인교회는 우리 시대의 사마리아인에게 어느 정도 베풀 수 있을까? 정결 예식도 모르는 이방인들과 밥상을 같이 할 수 있을까? 뭔가 계시를 받았다고 전통을 어기고 자기 해석대로 예수를 이방인들에게 전한 바울을 과연 지도자로 인정해도 되는 일일까? 도망간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는 그토록 주장하는 성서에 쓰인 대로 교회를 하는 것일까? 만일 타인종이나 소수자를 우리의 형제자매로 혹은 지도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양극화 시대에 이민 한인교회에는 다른 극단에 있는 이들을 존중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를 억압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가? 원수이자 타인이었던 에서와 목을 어긋 맞추어 포옹할 때에 형님 얼굴이 하나님 얼굴처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의 성서 해석학은 억압하는 애굽을 물리치시거나 불경한 족속들을 다 멸하시고,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하고 순수 혈통과 정결 예식을 강조하는 구절들에 치우치지는 않았는가?

4. 핵심 지도자들의 DNA를 관리하라.

목회 초기 교인들이 새로 오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정신없이 뛰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행기에 탄 사람이 많아지고 비행기도 매우 그럴듯해졌는데 비행기가 이륙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진, 즉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약했다. 교회의 코어가 건강하지 못하면 교회는 결코 날지 못한다. 권력에 민감한 사람들이 앉아있거나 혹은 남을 험담하면서 공동체를 나누려고 하는 사람들이 핵심 지도자라면 교회는 분열되고 만다. 목회자를 귀한 줄 알고 감싸주고 이해하려고 하고 협조하려는 덕이 있는 핵심 지도자들이 없으면 목회자가 넘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반면 교회 사이즈가 비록 작더라도 건강한 목회자와 함께 건강한 DNA를 지닌 핵심지도자들이 있으면 그 교회는 큰 가능성이 있다. 교회의 문화는 핵심지도자들이 만들어나가는 것이며, 그 지도자들은 목회자가 가슴으로 낳아야 한다. 교회 내적으로 외적으로 양극화의 도전이 있는 시대에 교회의 코어가 성숙하여 모순마저 그대로 품을 수 있는 핵심지도자들이 있다면 주변부에 혹시 문제가 있더라도 그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다. 혼란한 시대를 살아내는 교회를 이끄는데 목회자가 제일 시간을 많이 써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내면이요, 그다음은 교회 핵심 지도자 육성이다.

5. 거룩한 공교회가 가지는 권위를 실천하라.

사도신경을 영어로 가르칠 때 catholic이라는 단어가 천주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교회 혹은 공교회를 의미한다고 가르쳐 왔다. 나는 그 내용이 예수를 믿는 교회라고 한다면 웬만하면 서로 교회로 인정해 주겠다는 의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의미는 예수를 주로 섬기는 공동체는 아무리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의 언약의 공동체 됨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 언약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주인이신 예수이기 때문에 아무리 불편해도 같이 살겠다는 선포였다. 주님과 교회의 언약 관계가 결혼 언약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이 짝 지워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음이 언약의 핵심이다. 언약이 거룩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고 가정을 거룩한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은 결혼을 집례하는 교회의 권위 때문에 가능하다. 그 권위는 교회가 그 언약을 살아내기 때문에 가능하다.

교회가 공교회성을 버린다면 혹은 당파성에 교회가 나누어진다면 우리는 우호적 결별이라는 얄팍한 언어로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가 양립화 사회에서 한쪽으로 쏠려 다른 쪽 영혼들을 대상화한다면 교회의 공교회성은 무너지는 것이다. 개신교 자체가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는데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한다면, 부모 세대가 이혼했는데 내가 이혼을 하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하는 것과 유사한 이야기다. 양극화라는 우상에 대항해 반문화적이며 권위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 즉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인 공교회성을 살아내지 못했는데 어찌 스스로 당당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앞으로 교인들이 서로 싸우고 나서 다른 교회로 떠나려고 할 때 무슨 근거로 그들을 붙잡을 것인가?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 가정들에 어떻게 권위 있게 섬김으로 하나 됨을 설교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우리는 세상의 양극화라는 배경 때문에 교회도 분열을 겪는 사실에 크게 아파해야 할 것이다. 하다못해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이 구절만은 조용히 넘어가야 할 일이다.

도상원 목사 [email protected]
Raritan Shore District Superintendent & Dean of the Cabinet
Greater New Jersey Annual Conference

Contact Us for Help

View staff by program area to ask for additional assistance.

Related


Subscribe

* indicates required

Please confirm that you want to receive email from us.

You can unsubscribe at any time by clicking the link in the footer of our emails. For information about our privacy practices, please read our Privacy Policy page.

We use Mailchimp as our marketing platform. By clicking below to subscribe, you acknowledge that your information will be transferred to Mailchimp for processing. Learn more about Mailchimp's privacy practices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