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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연합감리교회의 역사적 회고와 전망

BY YOUNGYEUN LEE

한인이민교회의 역사는 개척기, 정착기, 성장기, 전환기의 과정을 보인다. 이제 한인교회는 그 역사의 주체자로서 다가오는 도전에 응전해야 하는 역사적 책임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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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최근에 발표된 통계자료와 한인연합감리교회 주소록에 따르면 현재 한인연합감리교회 수는 지난 2010년의 330개 교회에서 252개 교회로 감소하였다.[1] 한인교회의 급격한 감소는 한인 이민자들의 수적 감소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2] 앞으로의 한인 이민자들의 유입인구와 유학생들의 유입 숫자는 더욱 줄어들 전망이다. 이렇게 볼 때 한인교회의 장래는 그리 밝지 않다.

교회의 수적 감소는 단지 한인 이민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연합감리교회의 GCFA의 통계에 따르면, 2009년에 전체 교인 수가 7,772,966명이었으나 2018년에는 6,671,825명으로 불과 9~10년 사이에 110만 이상의 교인이 줄었다. 교회의 숫자는 2009년 33,814개에서 2018년 30,955개로 2,859 교회가 문을 닫았다. 전국적으로 매년 300개 교회가 문을 닫은 셈이다. 교회의 수적인 감소는 단지 연합감리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내의 주류 교회들이 당면하고 있는 공통된 문제이다. Gallup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서 지난 20년 동안 교인 수는 20% 감소하였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의 한인교회 감소와 퇴보의 원인을 단지 이민자의 숫자나 소수민족교회의 문제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다양한 사회적 요인이나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 혹은 영적 지도력의 부재와 같은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한인 이민교회의 역사적 회고

한인 이민교회의 설립 배경은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미국의 이민 정책과 함께 맞물려 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요인에 따라 필자는 한인 이민자들의 이민 시기를 크게 두 개의 시기로 구분하고자 한다. 첫 번째 이민 시기는 1903년부터 1964년까지이고 두 번째 이민 시기는 1965년부터 현재까지이다.[3]

1) 첫 번째 이민 시기의 한인교회들 (1903~1965)

첫 번째 이민 시기에 한인들이 미국에 이주한 첫 번째 동기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광혜원에서 의료선교사로 있었던 알렌이 휴가차 샌프란시스코에 왔다가 하와이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에 돌아와 고종에게 주청하여 고종의 윤허를 받아 공식적으로 첫 번째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1902년 12월 22일 인천의 내리교회 교인들과 부두 노동자들 그리고 서울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인천항을 떠나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오게 되었다.[4] 그 뒤 1903년 2월 10일에는 63명이 오게 되었다. 1905년까지 7,226명의 한국인이 하와이에 취업 이민을 오게 되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이민선에는 내리교회에서 파송한 홍승하 전도사(1903년)와 현순 목사(1905년)가 함께 타고 왔다. 이것은 한인 이민의 목적이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선교적인 목적을 띠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런 이유에서 하와이에 도착한 지 반년 만에 1903년 6월과 7월 사이에 최초의 한인교회를 시작하였다. 1903년 11월 3일에 정식으로 통역관 안정수 권사와 당시 지방감리사 조지 피어슨과 함께 ‘한인감리교선교회’(Korean Methodist Mission)를 조직하고 집을 구매하여 11월 10일에 첫 예배를 드린 것이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가 되었다. 1905년까지 하와이에 9명의 담임목사가 19개 교회 중에 13개 교회를 담임하였다.

초기 하와이 이민 교회는 크게 전도사업과 교육사업, 그리고 독립운동이었다.[5] 하와이 한인교회는 전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교회는 전도원들을 선택하여 각 섬에 파송하였다. 40여 개의 선교관이 세워지고 주일 예배를 드렸다. 또한 문서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하와이 한인기독회보’를 만들어 지역사회 소식을 나누고 교제하였다. 당시 노동자들의 삶은 노예와 비슷했다. 주일에 교회에 가서 시름을 달래고 마음을 달래는 것이 유일한 낙이요 안식처였다. 교회가 이러한 이민자들을 위한 유일한 안식처요 휴식처가 되었다.

또한 한인교회는 교육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초기 이민자들의 2/3(67%)가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영어는커녕 한글도 깨치지 못했다. 교회가 야간학교를 세워서 한글을 가르치고 어린이들에게 한글과 미국의 일반교육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4년부터는 워드만 감리사가 부임하면서 교회에서 영어 학교를 시작하였다. 1906년 9월부터는 학교 이름을 ‘한인기숙학교’(Korean Boarding School)라고 하였다. 첫해의 학생 수가 65명이었고 8학년까지 있었다. 1907년 초에 이 학교는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사립 공립학교’(Private Government School)로써 이 학교 졸업생은 어느 공립학교든지 진학할 수 있었다. 1913년에 이승만 박사가 프린스턴에서 학업을 마치고 이 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학교 이름을 ‘한인중앙학교’라고 이름을 바꾸고 독립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한인 이민자들이 민족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하와이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진행되었다. 1919년 10월에 3,404달러 5센트를 거두어 만주의 독립군에게 보냈고 하와이 국민회에서만 무려 300만 달러가 넘는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하와이의 한인교회의 역할은 초기 이민자들의 상한 마음과 상처를 나누어 주고 또 한글과 영어교육을 통해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또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과 독립자금을 전달하고 일했다.

미대륙에서 활약한 한인사회 개척자는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이다. 그는 유학차 도미하여 1902년 10월 14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24세에 미국 중학교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공부하면서 한인교포들의 복지를 향상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시행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03년 9월 23일에 이대위 등 10여 명의 망명 정치인들과 유학생들, 그리고 인삼판로의 상인들이 모여 ‘신민회’라는 한인 친목 단체를 조직하고 안창호가 회장에 피선되었는데 이 모임이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인교회가 되었다. 1905년 4월 5일에는 이 친목회를 ‘공립협회’로 개칭하고, 11월에 공립협회 회관을 설립하고, 11월 20일 국문판 ‘공립신보’라는 주간지를 발행했다. 또한 1913년 5월에는 안창호 선생이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이 흥사단은 미 전역으로 퍼져 전국적인 모임이 되었다.

미 동부 지역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는 1921년 4월에 설립된 뉴욕한인교회이다. 1919년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후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온건한 노선으로 바뀌면서 문호를 개방하면서 미국으로 유학생들이 오게 되었다. 초기 뉴욕 이민자들은 주로 유학생, 노동자, 소규모 영세 상인들이었다. 이들이 1921년 3월에 뉴욕한인회를 조직하였다. 1922년 뉴욕 타운 홀에서 삼일절 행사를 갑신정변 이후 이미 필라델피아 지역에 와서 의료사업을 하고 있었던 서재필 선생 등과 함께한 후 ‘뉴욕한인교회’ 설립을 논의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이때 크게 공헌했던 인물은 조병옥 박사다. 1927년에 지금의 위치로 교회를 옮기면서 교회 이름을 ‘뉴욕한인교회’라고 똑같이 사용하였으나 영어로는 “Korean Church and Institute’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Institute”라는 말은 뉴욕한인교회가 예수의 몸인 성전을 말하는 동시에 뉴욕한인사회에 사회적 봉사를 하여야 한다는 견지에서 정하였다.

뉴역한인교회는 특별히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교회가 되었다. 특별히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진주만 폭격과 함께 2차대전이 발발하자 부인회는 한인교포들과 외국 친구들에게 원조금을 받고 미국적십자에 원조금을 보내고 상해임시정부를 도와주고 일본군대에서 탈출한 한국 청년들을 도와주며 뉴욕지역에서 연합군 측 군대에 입대한 한국 청년들에게 선물을 보내는 일과 그들이 휴가를 얻어 돌아오면 환영하여 주었다. 또한 여성들도 조국 독립운동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의식을 고취하며 재미 한인 단체들의 단합을 촉진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이 중국 상해와 남경을 침입하자 뉴욕한인교회는 공동대회를 소집하고 즉석에서 “조국광복사업추진회”를 발족하여 만주와 중국 일대에서 조국독립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광복사업에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였다. 뉴욕뿐만 아니라 시카고지역에도 시카고제일연합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한인 이민자들이 모여 2차대전으로 인해 인종차별을 당하는 아시아인들을 돕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시기의 교회들은 민족 교회로서 어머니 교회로서 한인 이민자들을 돌보고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헌신하였다.

2) 두 번째 이민 시기의 교회들 (1965~현재)

1965년 10월 3일에 발효된 ‘케네디 이민법’ 이후로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이 법은 과거의 불의한 인종차별에 근거한 이민법을 철폐하고 인종을 떠나서 어떤 특정한 부류에 속한 사람을 우대하는 소위 ‘우선권제’(preference system)를 도입하여 “first come first served”의 원칙을 도입한 것이다. 이러한 새 이민법 발효 이후 1970년대부터 간호사, 의사, 전문 기술자들이 이민을 오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70년부터 2000년까지 많은 한국교회가 이민자들의 급증으로 인해 성장하고 안정을 취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교회들은 다양한 경로와 방법대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한인교회는 교단이나 연회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출발하였다. 연회의 정책이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서 설립된 것이 아니라 이민 온 한인 교인들과 목회자들의 자발적인 노력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교회들은 교단과 관계없이 초교파로 교회를 시작하였다가 후에 연합감리교회로 소속되었다. 또한 어떤 한인교회들은 백인 교회의 도움을 받아 백인 교회 안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교회를 시작하였고 혹은 세 들어 있다가 독립하여 성장하기도 하였다. 1980년 이후에는 소위 ‘선교 교회’라는 선교정책에 따라서 세워진 교회들이 많았다. 몰려오는 이민자들을 위해 대도시나 소도시의 중요한 위치에 전략적으로 교회를 세운 것이다.

이 시기에 한인교회의 첫 번째 역할과 사명은 무엇보다도 한인 이민자들의 미국정착과 안정을 돕는 일이었다. 한인 교회가 그들의 직업과 직장을 구해주고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정신적인 피난처를 제공해주는 마을 회관과 같은 곳이었다. 한인 이민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를 통하여 위로를 받고 교제를 나누며 삶의 안정을 추구하였다.

한국교회의 또 다른 역할은 2세 자녀들에 대한 문화 및 인성교육이었다. 한국을 떠나온 2세 자녀들이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서 한글학교를 비롯한 한국학교와 문화학교를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언어교육과 문화교육을 통해 많은 2세 자녀들이 한국의 언어와 문화와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한인연합감리교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연합운동이다. 1974년에는 전국에 흩어졌던 한인 목회자들이 LA에 모여서 ‘전국연합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에 송정률 목사를 선임하였다. 그 후에는 2년마다 전국적인 모임을 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매년 연례총회로 모이고 있다. 이 모임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교제와 단합, 프로그램 개발과 목회자 훈련, 한인 교회의 미래와 비전 제시 등의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또한 1992년에는 ‘통일위워회’(현 평화위원회)를 설립하여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족 화해를 위한 운동에 앞장을 섰다. 통일위원회를 중심으로 개체교회들이 ‘오병이어’와 같은 북한 동포를 위한 급식 운동에 참여하고 북한의 청소년들을 위해 북한에 교육 기관들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평화통일을 위한 걷기대회 및 포럼들을 진행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인연합감리교회는 ‘한인목회강화협의회’를 구성하여 새로운 교회 개척과 개체교회의 성장과 목회자 리더십 훈련과 문서 운동 등을 지원하고 있다.

한인연합감리교회의 전망

필자는 한인이민교회의 역사를 개척기, 정착기, 성장기, 전환기의 과정으로 보고자 한다. Ed Stecher 목사는 “현재의 미국 교회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6]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말대로 현재의 교회는 쇠퇴기나 소멸기가 아니라 새로운 위기와 도전에 직면한 ‘전환기’다. 전환기는 운동경기에서 마치 후반전의 반전을 노리는 작전타임과 같다.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는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라고 했다. 역사는 늘 새로운 도전과 응전으로 엮어진다. 한인교회는 그 역사의 주체자로서 다가오는 도전에 응전해야 하는 역사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필자는 지난 1세기 동안의 한국 이민교회를 회고하면서 첫 번째로 한인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도전은 ‘신학의 부재’(absence of theology)라고 생각한다. 한국을 포함한 미국의 신학교육은 신정통주의 이후에 여전히 “해방신학”이라고 하는 신학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신학교들은 인종, 여성, 종교, 정치, 성 해방 등 인권과 사회정의에 관한 문제를 주로 조직신학의 관점으로 다루어 왔다. 신학교에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정의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여왔지만, 개체교회의 성도들이 필요로 하는 영적인 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못했다. 웨슬리의 신학적 정체성은 칭의와 성화, 믿음과 행위의 균형 잡힌 영성이다. 21세기를 맞이하는 한인교회가 필요로 하는 목회신학(이민신학)과 영성으로의 새로운 실천신학적 전환(Practical-theological paradigm shift)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한국 이민교회의 목회 초점과 대상이 바뀌어야 한다. 이민 1세대들은 고령화되고 점점 대도시를 떠나고 있다. 2세들도 은밀하게 한인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7] 또한 그들은 뉴욕 맨해튼과 같은 대도시에 정착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한인교회의 차세대 목회초점은 1세를 지향하는 목회 패러다임에서 2세들을 향한 목회로 바뀌어야 한다. 2세들을 위한 목회자 양성과 교회 개척, 그리고 2세와 다문화 권에서 살아가고 있는 차세대들에 관한 관심과 접촉이 필요하다. 한인 이민자들의 수적인 감소만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자원들을 개발하고 발굴해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성장하는 교회가 있고 쇠퇴하는 교회가 있다. 성장하는 교회는 왜, 무엇 때문에 성장하는지 그 비결을 배워서 우리 것으로 접목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는 우리 한인교회가 이민 초기부터 해왔던 한인교회의 전통을 계속해서 발전 계승해 나아가야 한다. 한인교회가 한인 이민자들을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영적 자녀로 키운 어머니와 같은 교회로서, 낯선 이민 땅에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홀로 설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주고 디딤돌이 되어 주었던 아버지와 같은 교회로서, 나라의 앞길을 예견해주고 비전을 제시하고 새 나라의 새 일꾼과 지도자를 배출한 산실과 같은 선구적인 교회로서, 그리고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위기 속에서 독립과 해방을 위해 앞장섰던 독립운동의 요람과 같은 민족교회로서 앞으로 조국의 평화통일과 세계평화의 주체로써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는 지역사회의 문을 열고 다문화와 다인종을 위한 지역사회의 피난처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최근의 한국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신속하고 빠른 검진과 치료, 정보의 공유와 개방성 등을 통해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앞을 다투어 한국의 의료시설과 선진방식을 도입하여 접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를 통해서 한국교회가 지역사회에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마스크 등을 나누면서 더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만들고 새로운 영성과 교회의 모델을 제시하는 새로운 변화와 성장을 기대해 본다.

이용연 [email protected]
미드허드슨한인연합감리교회 담임 목사, Ph.D


[1] Chan-Hie Kim, The Korean-American United Methodist Churches and Ministries: Past, Present And Future: A Statistical Report (2014, October 20), 11. 한인연합감리교회 주소록 2019-20.

[2] Ibid., p. 17.

[3] 이미생 박사는 한인의 이민 시기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1) 정규이민 시기(1903-1905), 2) 제2의 이민 물결기(1951-1964), 3) 제3의 이민 물결기(1968-1987), 참고 ‘미주한인연합감리교회 역사’ 섬기는 사람들 (2010 Jan/Feb), 24-25.

[4] 학자들 마다 숫자의 차이가 있지만 인천부사의 공식적인 기록에는 남자 55명, 여자 21명, 아동 25명 모두101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5] 정석기 목사는 선교활동, 문화운동, 독립운동 세 가지 운동으로 보았다, 선교로 본 세계 한인 이민사 (쿰란 출판사, 2000), 29.

[6] Ed Stetzer, “The State of the Church in America: Hint: It’s not Dying,” Christian Today (2013 October).

[7] Helen Lee, “Silent Exodus,” Christianity Today (August 12, 1996). ‘침묵의 출애급’이란 아시안 2세들이 자신의 교회와 신앙으로부터 조용히 떠나는 현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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