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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의 구원론과 성화

By Hoo-Jung Lee

Stock open bible with pen

감리교회는 무엇보다도 구원받는 삶을 가장 중시하는 교회다. 역사적으로 감리교회가 시작되었던 동기와 유래를 생각해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18세기 영국의 국교회 목회자였던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가 시작한 신성회(Holy Club)는 바로 감리교회의 출발점이었는데 그들은 몇 명의 회원들과 함께 거룩한 생활을 추구하면서 충만한 구원의 길과 그에 따른 엄격한 삶을 실천하려 했다. 당시 영국의 교회와 사회는 도덕적으로 가장 해이하고 부패한 시대 중 하나를 경험하고 있었다. 세상에 빛이 없었고 교회는 사명을 거의 잃어버렸던 때였다. 그런 한가운데 그들은 가장 철저하고 훈련된 형태로 자비를 베푸는 경건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헌신했다. 그것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을까?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헌신을 받아 주시고 나라와 민족과 열방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경이로운 영적 회개와 갱신 운동을 일으키셨다. 이 “위대한 구원”을 목표로 감리교회는 시작되었다.

오늘도 우리가 사는 시대와 세상은 변함없이 멸망과 죽음의 길을 달려가고 있다. 눈에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에 걸쳐 인류는 구원을 목말라 갈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대가 그 구원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데 있다. 궁극적으로 행복과 성결이라고 웨슬리가 말한 구원은 무엇이며 어떻게 얻고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체험하며 그분과 깊이 영적으로 교제하는 것이 그 길인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 목사는 그 어떤 다른 교회사의 위대한 인물들 이상으로 구원론에 집중된 신학과 영성을 제창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 원리와 실제를 분명히 깨닫고 그 유산을 오늘 보편적 교회 안에서 부흥시키는 귀한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웨슬리의 구원론을 전체에 걸쳐 포괄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중해서 성화론을 중심으로 설명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의 성화론과 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야말로 감리교회의 구원론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며 사랑의 힘은 그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임하고 반영되어 이웃과 세상에 비추는 빛이 된다.

칭의와 성화를 초점으로

먼저, 우리는 웨슬리의 구원론이 “구원의 순서”를 그 전 과정에 걸쳐 관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구원의 과정을 집으로 비유하였다. 그 전체를 은혜의 관점에서 보았는데 선행하는 은혜가 있어서 그 현관 입구 역할을 한다고 했다. 나아가서 칭의의 은혜는 문에 해당하며, 성화는 그 안에 우리가 거주하도록 부름을 받은 집안, 그 방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선행하는(앞서 오는) 은혜는 원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보편적 본성 안에 주어져 있는 은총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양심,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시초에 가지는 관심인 여명과 같은 갈망 등이 선행 은혜가 된다.

그러나 선행 은혜로서 인간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한 은혜의 역할은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웨슬리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개신교의 아버지 루터나 칼빈과 같이 의롭다 하시는 은혜에 주목한다. 하지만 웨슬리의 구원론에서 중요한 점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창조를 갱신하시는 재창조 혹은 새로운 창조의 에너지를 통한 사랑의 역사라는 포인트다. 의롭다 하심과 거듭남(중생)의 은혜는 동시적이지만 논리적으로, 즉 생각의 순서에 따르면 칭의가 먼저요 중생이 따라온다. 죄인인 인간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고 오직 믿음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구원의 핵심임을 웨슬리는 확신한다.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갱신하시는 것, 즉 중생(신생) 역시 중요하며 오히려 어떤 점에서 그것이 더 중요하게 그에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웨슬리에게는 중생이 가진 확증적이고 체험적인 차원에 큰 의미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웨슬리의 구원론에서 회심을 통한 중생과 성령 체험이 가지는 중요성에 눈을 돌려야 한다. 웨슬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위대한 부흥 운동의 인도자였다. 그 부흥 운동은 영적 갱신 운동, 성령 운동, 실천적 변형 운동이었다. 따라서 단지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과 영성에 웨슬리는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웨슬리에겐 회심, 즉 회개의 역사가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가 구원론에서 아주 중요했다. 그는 영국적인 경험주의자로서 중생과 성령 체험에 있어서 믿음이 “영적 감각”으로 작용하는 점에 포착했다. 거듭나는 구원의 경험을 영적인 감각이 깨어나거나 재창조되는 것을 통해 설명할 수 있었다. 이 점에, 곧 종교 체험의 리얼리티에 웨슬리의 독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올더스게이트 체험이 가지는 구원론에서의 의의가 거기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웨슬리의 구원론을 개신교 일반, 즉 루터나 칼빈의 구원론과 비교하여 볼 수 있었다. 루터는 특히 믿음과 칭의의 주제에 모든 구원론의 중심과 무게를 두었다. 칼빈에게는 물론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주권 신학과 예정론과 같은 구원론 주제가 아주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웨슬리에겐 칭의보다 중생(회심)과 성화에 더 큰 구원론의 관심이 기울여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에겐 구원의 객관적이고 관계적인 차원도 중요했지만, 그것이 참으로 실제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혹은 생명의 경험이 되는 주관적이고 리얼한 차원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칭의는 구원의 기초요 죄 사함과 하나님 사랑의 근원에 대한 관계적인 변화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 영생을 누리게 되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중생이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구원론의 초점이 성령의 역사 하심에 맞춰진 것이다. 나아가 그 실제적인 변화의 체험은 반드시 “성령 안에서” 성화의 변모되는 삶을 살아가는 “충만한 구원”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성화와 완전의 구원론이 가지는 의미

구원은 웨슬리에게서 가장 위대한 복음의 주제이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증거하고 선포하고 있다. 죄로 가득한 인간과 역사, 세계 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하여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그것은 단지 이성으로 이해되는 차원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차원도 아니다. 오직 믿음이란 신령한 감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계신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을 체험하는 구원에 특히 관심과 초점을 집중시켰다. 그에게 하나님은 단지 이성적, 관념적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감지할 수 있는 영적 체험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체험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는 성화로의 길로 나가는데 그것은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 은혜에 의해 가능하다.

이처럼 웨슬리에게는 구원이 사랑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에 이르는 성화라는 표현에서 가장 완전하고 충만하게 드러난다. 성화란 무엇일까? 믿음의 충만인 성화는 구원의 완성이요 참된 종교의 아름다운 최종 건축이다.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과 정신이요,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가 가장 좋아한 표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갱신하고 회복하는 것이 성화라는 것이다. 타락한 죄 아래 죽어가는 인류와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여 거룩함, 참과 의와 같은 그분의 형상을 새롭게 하며 회복되는 치유의 과정이다. 루터에게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 안에서 신분이 복권되는 관계 회복의 칭의였다면, 이제 웨슬리에게서 참된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온전한 분량, 충만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령에 의해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는 변형의 과정이 된다. 웨슬리는 성화가 칭의보다 무한히 더 큰 변화라고 말했다. 이제 구원의 삶에 참여한 신자는 그 목표로서 완전한 사랑을 향해 끊임없이 앞으로 진보하여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웨슬리가 죄의 부정적인 국면을 극복하는 것에 관심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죄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물론 이생에서 과연 우리가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느냐 하는 어려운 질문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가능할까? 죄의 지배 아래 더는 있지 않은 우리는 죄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는 것일까? 여기에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답변을 피하기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는 성화, 특히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전적인 성화의 목표를 중요하게 보았다. 비록 우리가 죄와 계속 투쟁하여 마침내 그 권세에 완전히 승리하는 것이 현세에서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그 죄의 세력이 점차로 감소하고 멸절되고 약해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마침내 그 죄의 이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지배와 권세가 완전히 멸해질 때는 오지 않을까? 어떤 한순간에서라도 완전한 승리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까?

웨슬리 구원론의 핵심을 이루는 성화론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주제로 표현되었다. 성화의 긍정적인 차원으로서 웨슬리는 사랑의 궁극적인 주제를 자신의 은혜 신학을 완성하는 의미에서 주장하였다. 사랑은 점점 증가하면서 그 한계가 점점 확대될 것이다. 그 사랑은 물론 우리에게 그 근원과 원천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게서 넘쳐나는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들어 와서 우리를 채우며 변화시킨다. 여기서 웨슬리는 우리가 단지 수동적인 차원(전가된 의)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성화는 하나님 은혜의 역사임과 동시에 우리의 응답과 참여라는 협력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으로 된다. 거룩한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며 자녀인 우리도 거룩한 성도가 되며 점점 더 거룩함으로 채워지면서 단계, 정도에 따라 변화된다는 것이다.

웨슬리에겐 결국 구원의 과정적인 성격이 목회적이고 경험적인 그의 실천적인 신학의 토대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가왔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의 과정에서 죄도 죽음으로 끝나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 완전히 승리하고 지배하는 마지막 순간을 목표로 본 것이다. 웨슬리는 완전을 향해 성화되어 가는 성도들이 죽음의 시기에 임하여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 죄에 관해서는 인간이 육체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는 한 오류와 실수, 잘못 등에서 자유롭기가 불가능하므로 완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일 뿐이라고도 했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희망으로 현재의 삶을 양육하고 형태 짓기 위해 완전이란 기대, 목표를 계속 가지는 것의 중요성과 가치를 구원의 삶에서 충분히 인정하는 것과 같다.

결국, 완전 성화는 사랑이다.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전적으로(완전히) 사랑하는 것이며,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처럼 웨슬리에게 구원의 삶에서 계명을 지키고 순종, 성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계명은 사랑의 계명이 아닐까? 율법의 완성은 사랑의 계명으로 집약되지 않을까? 웨슬리는 또한 성화와 완전이 곧 그리스도 안에 있던 마음, 정신을 우리가 품고 그분이 걸어가셨던 길을 좇아 똑같이 행하는 실천과 행위의 삶에 있다고도 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의 구원받은 영성 생활은 매일 죄에서 정화되어 순결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성숙한 덕 있는 성품과 성령의 열매들로 충만해져 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곧 충만함(온전함)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러한 성장과 성숙에 불가결한 중요성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주어지게 되지 않을까?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목적과 의도는 이와 같은 삶의 충만한 사랑, 신적 건강함의 회복에 있다고 본 것이다.

충만한 구원의 통전성과 우주적인 사랑

마지막으로 우리는 웨슬리의 구원론이 가지는 공동체적, 교회적, 사회적인 성격에 관해 살펴보려 한다. 웨슬리의 성화론, 완전의 구원론은 결코 개인주의나 경건의 내면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비록 의도의 순수성, 단일성을 완전한 사랑에서 중요한 동기와 내면성으로 삼았지만, 웨슬리에겐 언제나 개인주의적인 영성을 넘어서고 극복하려는 지혜와 열정이 있었다. 그는 기독교의 구원을 고독하고 은둔주의적인 경건에서 보려고만 하는 일방적인 경향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때문에 웨슬리는 루터파 경건주의자인 모라비안교도들에 의해 회심을 경험했지만, 그들의 정적주의를 거부하게 되었다. 반대로 그에 의해 힘 있게 강조된바 기독교는 사회적, 공동체적 종교라는 표현은 이웃 사랑의 계명에 근거한 것이다. 이 사랑은 활동적, 행동적인 사랑이며 자비로운 선행의 열매를 맺는 사랑이다. 특별히 산상수훈에 대한 많은 설교를 남겼던 웨슬리는 기독교와 성도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말씀에 관심을 기울였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며 사랑의 힘은 그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임하고 부은 바 되어 우리에게서 반영되어 타자(이웃)와 세상에 비추는 빛이 된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부은 바 되는 하나님의 사랑(로마서 5:5)은 웨슬리가 가장 애호한 중심 진리 중 하나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완전하고 거룩한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응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원천이다. 그런데 이제 이 거룩한 사랑은 그 은혜에 응답하여 이웃에게, 온 세상에 반사되고 나뉘는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의 에너지로 충만한 성도,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하는 성도는 따라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된다. 그 사랑은 우리 안에서 불붙여지고 타올라 우리의 행동, 대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랑의 수고로 열매 맺게 된다. 웨슬리는 심지어 원수에게까지도 이 사랑은 펼쳐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 적합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웨슬리는 후기 설교들 속에서 구원에 대한 더욱 원대한 구도와 지평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목적과 완성의 성취를 단지 인간 개인의 내면적 경건에 제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 창조된 세계 전체의 갱신이라는 총체적 비전 속에서 읽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창조 등의 여러 설교 속에서 구원을 우주적인 차원으로 확대하게 되었다. 이 점은 웨슬리가 초대 교부들의 신학에 상당히 뿌리를 둔 독특한 변형의 비전을 형성했다. 만물이 다시 새롭게 되어 창조된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의도와 목표에 따라 회복되는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구원의 소망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웨슬리의 구원론을 완전 성화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비전 속에서 살펴보았다. 오늘 감리교도들은 이와 같은 위대한 구원의 비전을 복원하여 파괴되고 상실된 세계 속에서 갱신, 변혁하는 사명을 다하는 주님의 참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엄청난 역사적 도전과 변화 앞에서 구원의 횃불을 드높이는 교회로서.

이후정 교수 Ph.D
[email protected]
LID Leadership Journal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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