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자리
By Wonwoo Lee
들어가며
예배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일견 지나칠 때가 있으나 여전히 설교는 목사에게 중요한 목회 현장이다. 목회 자리마다 저마다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설교자의 가장 큰 실존적, 신학적 고민은 자신의 선포를 곧 하나님 말씀이라 확정할 수도,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는 데 있다. 설교자의 사명 중 하나라면, 그 난처함을 끌어안고, 성경을 본문 삼아 이 시대 특정 공동체에 하늘의 목소리를 닿게 하기 위해 끙끙대는 애씀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설교를 이렇게 준비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지시나 방법론에는 회의가 있다. 배우며 익혀야 하는 시기가 분명 있으나, 어느 시점에 가서는 설교자 자신의 결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무엇보다 설교자가 서 있는 각자의 자리가 다르기에 누군가가 설교에 대해 하는 조언은 정확하다 하더라도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기에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보다는 설교의 언어는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무엇이 설교인가?”에 대한 고민이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보다 앞서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음은 나 스스로가 이루고자 하는 설교의 모습이다.
설교는 청중을 하나님의 세계로 이끄는 일이다.
1. 성경의 세계를 품으라.
이번 주 설교 본문은 내가 택한 주제를 논증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라, 그 본문이 그리는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이끈다. 이는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나님 말씀이라는 근본적인 고백 위에 서 있다. 설교에 성경의 세계를 품으려면, 설교자는 단어와 문장, 절과 장으로 이루어진 성경을 읽고 석의하고 해석하여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해 뒤에는 성경이 나를 해석하는 시간에 머물러야 한다. 그렇게 성경의 세계와 마주하고 그 세계를 맛본 설교자는 이제 그것을 공동체 앞에 생생한 언어로 전한다. 청중이 자신이 속한 세상 너머에 참된 하나님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고, 그 세계를 기대하며 돌이키는 자리까지 이끄는 것이 설교의 역할이다.
이때 성경 본문은 설교를 뒷받침하는 근거나, 개인과 사회 문제의 해답을 주는 자료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본문을 이 시대에 익숙한 상식의 언어로 서둘러 풀기보다, 회중이 본문의 언어를 배우고 익혀 그 안으로 스며들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복음이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용하다고 납득시키는 데 그치지 말고, 복음으로 개인과 주변과 세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보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더 풍부한 수사와 더 많은 예화를 찾기 전에, 먼저 본문 안의 새롭고 신비한 세계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2. 나만의 세계를 넘어서라.
누구나 그렇듯, 설교자에게도 오랜 시간 형성된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의 틀, 오랫동안 써 온 교회 언어, 반복되는 목회 현장에서 익힌 사고방식과 표현이다. 이러한 세계는 설교자를 세우는 중요한 자산이지만, 동시에 조심해야 할 위험이기도 하다. 익숙함에 익숙해지면 어느새 보는 것만 보고, 아는 것만 말하게 된다. 매주 반복되는 설교 준비로 하나님 말씀 앞에 서는 긴장감이 무뎌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둔해진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내게 편한 언어에 갇혀 설교하는 나를 발견한다. 결국 성경을 말한다고 하지만, 청중이 살아가는 현실과는 점점 멀어질 수 있다.
물론 설교자의 첫 번째 재료는 설교자 자신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은 말하기를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설교자의 삶을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설교자의 경험과 언어는 설교의 출발점일 뿐 종착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두려워하고, 갈망하는지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이는 성경을 시대에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성경의 세계 안으로 초대하기 위해서다. 설교단은 참으로 귀한 자리이지만, 자칫 그럴듯한 종교적 언어의 향연이 벌어지는 온실이 될 수도 있다. 영적 교훈과 축복, 희망과 확신의 말이 삶의 척박함과 고단한 일상, 시대가 던지는 불편한 질문을 가려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질문과 상처를 이해하고, 그들을 성경의 세계로 이끌어야 한다.
3. 청중의 세계와 부딪치라.
청중의 세계를 이해하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지만(요한복음 3:16), 동시에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신다(요한일서 2:15). 그러므로 설교에는 교회 밖의 세상, 그리고 우리 안에 자리한 세상의 가치관과 부딪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
교회 밖 세상은 거대한 신념과 문화, 체계 안에서 움직인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성공을 바라며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간다. 세상은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진리를 생략한 채 "답은 네 안에 있다"라고 외친다. 너를 얽어매는 것에서 벗어나라고 하거나, 반대로 이런저런 일을 해내야만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한다. 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라고 외칠 수 없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을 모르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의 감격을 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세상의 목소리에 맞서 그 허망한 약속의 실체를 폭로하고, 하나님 나라의 참됨과 가치를 전해야 한다.
이 맞섬은 교회 밖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교회는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이들이 모인 곳이다. 그 불완전함은 때로 "하나님"조차 우리의 약함과 욕망을 투사한 우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본질을 잃은 전통, 잘못된 신앙관, 당연하게 여겨지는 교회의 관습이 그렇다. 설교자는 이런 것들까지 분별하여 회중을 바른 신앙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
4. 설교의 정합성을 지키라.
설교는 일상의 대화가 아니다. 설교자 한 사람이 정해진 시간과 순서 속에서 여러 청중에게 성경의 세계를 전하는 일이기에 설명과 설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설명과 설득은 말하는 이의 태도와 함께, 무엇보다 내용의 정합성 위에 세워져야 한다.
정합성은 거창한 논리가 아니다. 한 문장이 다음 문장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앞의 설명이 뒤의 어떤 내용을 위해 필요한지, 청중이 자연스럽게 품게 될 질문을 설교 안에서 다루는지, 예화는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쓰이는지, 인용은 본문의 세계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지 점검하는 일이다. 그렇게 설교의 흐름이 하나로 모일 때, 청중도 설교를 따라가며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설교는 논문이 아니며, 논증의 유무만으로 평가할 수도 없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려고 앉아 있는 이들에게 들리는 설교가 되려면, 생각의 구슬을 흩어 놓고 청중이 스스로 꿰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설교자는 이미 잘 꿰어진 구슬 목걸이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것은 기승전결의 구조일 수도, 질문과 답의 형식일 수도, 반전과 논리, 공감과 이야기하기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설교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청중을 이끄는 것이다. 정합성은 설교를 더 논리적으로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청중이 하나님의 세계를 끝까지 따라가도록 돕는 배려다.
5. 하나님을 높이라.
설교 가운데 하나님이 드러나고 높아지는 것, 이것이 강연과 설교의 가장 큰 차이다. 하나님을 높이는 구체적인 실천은 먼저 내 꼴과 자리를 아는 데서 시작한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이 드러날 자리가 생긴다.
예배 후 찾아와 "오늘 설교에 은혜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내 탁월함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의 착한 마음 덕분임을 알아야 한다. 더 냉정하게 말하면, 설교의 목적이 감동이 아니라 삶의 변화임을 기억할 때 그 말은 아직 열매 맺기 전의 공허한 말일 가능성이 크다. 교회 밖에서 만났다면 잔소리꾼에 지나지 않았을 나의 빈약한 존재와 밑천이, "교회"라는 특별한 공동체와 "예배"라는 구별된 시간, "목사"라는 직함에 기대어 영적 지도자의 권위를 얻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의 첫 번째 청중은 나 자신이어야 한다. 이런 나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돌들로도 소리치게 하실"(누가복음 19:40) 능력의 하나님께서 내 무지와 빈약함을 통해서라도 하늘의 목소리를 선포하시기를 바라며 나아가자.
나가며
다섯 가지를 제시했지만, 나 역시 "내 설교에서 이 모든 것을 완벽히 이루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은 없다. 그것이 서두에서 말한 설교의 신학적 고민 앞에서 설교자가 겪어야 할 어려움이 아닐까 싶다. 설교자는 성령 하나님이 청중에게 말을 걸어오시기를 기대하며 준비하고, 청중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시기를 소망하며 들을 뿐이다. 매주 설교단에 서는 이 귀하고도 무거운 수고를 우리가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 도우소서.
English - Where the Preacher Stands
이원우 목사
Bloomington Korean United Methodist Church,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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