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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변화와 생태적 전환 그리고 교회 (3)

By Beom-Shik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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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변화와 대응에 관한 몇 가지 질문들

기후 변화로 인한 화석 연료 및 탄소에 기반한 인류 문명의 문제점이 가시화되면서 대중들의 변화에 대한 노력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가고 있다. 기후 변화와 관련된 지구적 토론과 그 대응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는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한국 교계에서는 이와 관련된 토론이나 특별한 대응 노력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 글은 교계와 신앙인들이 이 문제를 토론해야 할 이유와 그 출발점에 대한 단상을 몇 가지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빌려 제시해 보고자 한다.

3. 기후 변화의 위기와 생태적 전환에 대해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의 활동이 지구에 끼친 지대한 영향에 대한 지질학계의 논쟁은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는 시기 구분을 둘러싸고 21세기 들어 본격화되었다. 크뤼첸(Paul Crutzen)과 스퇴르머(Eugene Stoermer)는 산업 혁명 이후 인류는 수천 년, 아니 수백만 년간 지질학적 주도 세력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지질학은 현 지구의 연대를 홀로세(Holocene)로 지칭하지만, 2009년 결성된 ‘인류세전문검증그룹’은 2016년 연구 결과를 <사이언스지>에 발표하면서 기존의 연구들이 발견한 층서학적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지구의 연대 단위가 인류세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인간의 지구 환경에 대한 영향력을 이제 더는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제 크뤼첸이 부른 “지구 시스템 관리자”로서의 인류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 같은 논의들이 주는 의미는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후 변화에 대한 인간의 대책이 요청된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확실히 회복될 수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환경을 파괴한 인간 죄성이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교만’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의 ‘정복자’였던 것처럼, 또한 인간이 병든 자연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똑같이 위험하다. IPCC 보고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간 활동이 기후 온난화를 추동한 중요한 원인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곧 우리가 이 메가트렌드를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당장 온실가스 감축을 시작하더라도 기후 온난화의 트렌드를 바로 되돌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구 환경과 기후에 대해 인간이 단시간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미미하며, 더구나 기후 변화로 야기되는 위험을 미리 예방하기 위한 노력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기후 변화에 대한 우리의 무력감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가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연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가 우리를 “책임 있는 존재”로 세우셨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맡기신 책임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고 그 명령에 바르게 반응해야 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한 이후 로마 교황청은 환경 파괴를 인간이 참회해야 할 큰 죄이며, 10억 가톨릭 신자가 환경주의자의 마음으로 적극적인 환경 보호에 나서야 한다는 태도를 보여 왔다. 2019년 11월 교황은 생태적 죄악을 가톨릭 교리에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개신교 내에도 생태계 위기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들이 있었다. 생태학계에서 제기된바 기독교의 창조 신앙과 문화 명령은 창조된 자연 만물이 오직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존재한다는 교리를 발전시켰고, 이런 전통이 서구와 과학 기술의 근간이 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생태계 위기는 기독교 책임이라는 비판이 그 중심에 있다. 물론 기독교 내에서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생태계의 위기는 창조론과 문화 명령 이외에 죄와 타락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 창조–타락–구속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쟁은 기독교, 특히 보수주의 교계 내부에서는 다양한 생태 신학에 대한 녹색 피로감과 연결되면서 환경/생태 신학을 불편하게 느끼는 태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책임 있는 청지기로 세상에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의 명령이란 관점에서 볼 때, 교회는 이런 비판에 대해 반성하고 변화를 주도해 나갈 필요가 있다. 다만 생태계의 파괴와 위기가 전적으로 혹은 상당 부분 기독교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쉽지 않다. 생태계 위기는 상당히 복잡한 요인들과 역사적 계기가 결합하여 초래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사려 깊은 연구자들은 모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소극적 입장을 벗어버리고 적극적으로 창조 세계의 회복을 위한 노력에 나서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교회에 더 큰 책임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충성된 청지기로서 교회는 소극적 입장을 벗어버리고 적극적으로 창조 세계의 회복을 위한 노력에 나서야 한다.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의 아름다운 조화와 질서를 상실하게 한다. 따라서 환경 문제는 자연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교인들이 책임 의식을 가지고 대응해야 할 문제라는 인식이 회복되어야 한다. 특히 인간과 자연의 관계와 관련하여 과거 자연에 대한 미신과 숭배로부터 인간이 해방될 필요가 있었다면, 이제는 인간의 기술과 탐욕으로부터 자연을 해방할 필요가 있다. 죄에 의해 타락한 인간의 탐욕은 문화 명령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끊임없는 기술 발전과 인간의 진보라는 신화 속에서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했다. 사실 정복하라는 명령의 히브리어(kabash)는 대상에 대한 소유와 지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가꾸고 돌보며 스스로에게도 유익이 되는 공존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다스린다는 히브리어(radah)도 부모–자식 관계에서와 같은 사랑의 돌봄과 치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피조물 인간에게 피조물 자연에 대해 청지기로 관리의 소임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던 우리의 관점은 하나님–인간 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창조 신앙의 관점으로 확대되어야 하고, 자연에 대한 책임 있는 청지기로서의 인간의 사명이 새롭게 정립되어 무지의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가 시작되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더라도 구체적 성과를 손에 쥘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취가 아니라 창조 질서의 회복을 향한 올바른 방향이다. 인간은 분명한 한계를 지닌 존재다. 우리가 자연을 다 책임질 수는 없다. 하지만 자연과의 관계를 창조 질서 가운데 회복하려는 순종의 걸음은 옮겨야 한다. 피조물인 인간과 자연은 창조주에 대한 절대적 의존 속에서 그 존재의 근원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조화의 창조 질서가 은혜 가운데 회복될 필요가 있다. 온전한 회복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기후 변화와 생태적 전환 그리고 교회 (1)

신범식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LID Leadership Journal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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