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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시대, 한국 교회를 향한 제언

By Jin Kyu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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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회복을 위해 한국 교회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복음이 말하는 탈물질주의적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질주의, 배금주의 시대가 만든 절망에 신음하는 한국 사회는 이를 대신할 대안을 애타게 찾고 있다. 종교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저널리즘 미디어는 그 비판의 근거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종교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 비판에는 종교가 현시대를 지배하는 주류적 가치의 실패를 대신할 대안적 가치의 근원으로서 기능해 주기를 바라는 세속 사회의 기대가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그 대안적 가치는 탈물질주의가 되어야 한다. 물질적 자원의 한계와 분배의 공정성이 갈등현상 대부분의 근본 원인이라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취급할 수 없다.”

태극기, 성조기, 그리고 이스라엘기

2017년 봄, 매 주말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손에는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처음에는 태극기가 이들의 주장을 대변하는 유일한 상징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이곳에 대형 성조기가 함께 나오기 시작했고, 삼일절을 기념하는 집회에서는 이스라엘 국기도 등장했다. 이 장면은 신문과 방송뉴스를 통해 전국 안방에 전달되었다. 언론은 정치성 강한 이 집회에 나부낀 태극기, 성조기, 이스라엘기의 조합을 “보수 기독교”라는 말로 설명한다. 언론이 사용하는 이 말은 삼일절 기념 “구국기도회”를 주관한 주체가 개신교 내 보수적 세력임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개신교는 곧 한국 사회의 이념적 지형에서 보수 편에 위치한다는 대중적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중들에게는 이 이미지가 낯설지 않다. 같은 장소에서 2003년에 열린 구국기도회에서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나부끼던 장면이 TV 화면에 처음 등장하였고, 개신교에 대한 대중의 집단적 기억에 오래 남겨질 장면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사에서 개신교의 정치적 스탠스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 가장 처음 대중적 집단기억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L.I.D 2018의 특집 주제는 “갈등과 조화”다. 이 글은 필자의 연구 분야를 이 주제와 연결하여, 한국 사회의 동시대적 맥락에서 “갈등”의 의미를 조망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교회를 위해 몇 가지 제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미디어학자로서 필자의 주된 연구 분야는 ‘상징영역’(symbolic sphere)에서 종교가 나타나는 다양한 국면에 대한 탐색이다. 신문과 뉴스 등 저널리즘 영역, 그리고 TV 드라마, 영화, 음악 등 대중문화 영역을 아우르는 미디어에 재현되는 종교, 다시 말해 “매개된 종교”(mediated religion)는 어떤 특징들을 갖는지 살펴볼 뿐 아니라, 이렇게 미디어에 드러난 종교에 대한 일반 대중의 반응은 어떠한지 분석하는 일이다. 한편 그리스도인 학자로서 이러한 연구 결과를 이차적으로 재해석해 교회 공동체를 위한 정보로 생산, 제공하는 일도 함께하고 있다.

한국 교회를 바라보는 대중적 인식

종교사회학은 사회제도로서 종교의 핵심적 기능을 “통합”(integration)이라고 말한다. 종교는 사회 내 존재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에 따라 발생하는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내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성서가 강조하는 교회의 역할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평화를 만드는 자”(peacemaker), “화평케 하는 자”의 사명은 갈등과 분열에 대처하는 교회의 기본적 자세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강력하게 천명한다.

그렇다면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상징 영역에 재현되는 모습에 비춰볼 때 한국 교회는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기본 자격에 크게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에서 대중적 인식은 개신교를 갈등 조정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과의 소통에 실패한 교회는 화평케 하지 못한다.

첫째, 한국의 대중적 인식 속에서 개신교는 권력 사이의 이해관계와 상호갈등을 조정하는 존재가 아닌, 권력(power) 그 자체로 규정된다. 일간 신문의 종교 섹션 분석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다종교 상황에서 여러 제도 종교를 보도하는 저널리즘 미디어는 개신교를 여타 종교보다 훨씬 더 비판적으로 보도한다. 종교 보도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저널리스트들은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까?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권력으로서 위상이 훨씬 강하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핵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저널리즘을 신봉하는 세속 언론으로서는 개신교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매우 정당하다는 것이다.

언론인과 일반 대중이 개신교를 ‘권력’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다음 몇 가지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주류 문화와 가치를 변혁할 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소외된 약자의 편에 섰던 한국 교회는 어느새 주류의 한 축으로 성장하였으며, 또한 권력을 대변하는 세력으로 인식된다. 교회 세습을 비롯해 교단 선거에서의 잡음 등 교계 안팎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각종 이슈는 교회를 일반 대중에게 견제해야 마땅한 권력 자체로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다. 개신교의 이념적 정체성이 경직된 보수로 규정되는 것 역시 권력을 대변하는 집단이나 권력의 정신과 가치가 지배하는 곳으로 인식되는 데 이바지한다. 이렇게 권력 자체로 인식되는 한국 교회는 갈등 조정자 역할의 담당자로 인정될 수 없다. 성서의 언어로 표현하면 교회에 요구되는 “다름” 혹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거룩함”을 상실한 것이다. 세상의 정신과 가치가 지배하는 교회는 갈등의 시대에 화평케 하는 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

둘째, 한국 교회는 “이웃”과의 관계에 무능한 존재로 인식된다. 대중은 개신교를 신과의 소통에는 열정적이며 유능하지만, 이웃과의 소통에는 큰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능력도 없다고 본다. <밀양> 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비롯하여 개신교를 비판하는 수많은 대중문화 내러티브들과 이제 디지털 영역에서는 일상화가 되어버린 그리스도인에 대한 조롱 섞인 비판에는 이런 인식이 깔려 있다. 개신교는 예배, 종교활동, 집단의식 등에 있어서 여타 종교보다 훨씬 적극적이며, 동시에 전도와 선교에서도 매우 공격적이다. 이는 개신교를 인식하는 또 하나의 특성인 ‘배타성’과 결합하여 세속 사회와의 소통에 유능하지 못한 모습으로 비친다.

커뮤니케이션의 측면에서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과의 소통과 이웃과의 소통 모두를 강조하며, 어느 하나에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배제한 채 드려지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경계하셨다(마태복음 23:23). 한국 교회의 모습, 최소한 대중의 눈에 비친 한국 교회의 모습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에게는 열정이 넘치고 최선을 다하지만,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적대적이거나 몰이해의 태도를 지닌 종교 집단이다. 이웃과의 소통에 무능한 개신교다.

세상과의 소통에 실패한 한국 교회는 화평케 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대중에게 교회의 목소리는 화해의 소리로 들릴 수 없다. 화해와 평화를 이야기하는 개신교의 주장은 폐쇄적 종교의 집단 이기주의적 발상이거나 특정 세력의 이해관계를 은폐한 기만에 불과하다고 인식되곤 한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자신을 훈계하는 목사에게 금자가 남긴 말 “너나 잘하세요”라는 개신교에 대한 이런 대중 인식의 반영이다.

갈등의 시대

갈등의 시대다. 냉전 종결 이후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결에서 벗어나 평화의 시대를 맞이할 것만 같던 세계는 오히려 전 지구적으로 더 많은 갈등과 분란에 휩싸여 있다. 유럽에서는 난민 문제와 인종적, 종교적 갈등, 그리고 브렉시트(Brexit)로 대변되는 유럽연합공동체 실험의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다. 미국 역시 신자유주의 정책 실패에 대한 보상책으로 보호 무역과 국가 이기주의를 내세운 세력이 패권을 잡는 이변이 나타났다. 오랜 내전과 국제 관계의 이합집산 속에 신음하는 중동은 물론이고, 포스트-제국주의(post-imperialism)가 강요하는 각종 문제로 아파하는 건 아프리카와 아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 어떠한가? 지난 몇 해간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굵직굵직한 쟁점들만 봐도 지금은 갈등의 시대임을 확인시켜준다. 세월호 참사, 일본군 위안부 한일 합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 사드(THAAD) 배치 논란, 최순실 게이트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서 갈등과 분열은 상존한다. 사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사건들은 더 구조적인 차원의 갈등 요소에 비하면 오히려 해결하기 쉽다. 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선택의 여지 없이 채택했던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배태하는 불안, 공포, 절망, 분노, 증오 등의 집단적 감정은 훨씬 더 감당하기 어렵다. 2000년대 초부터 등장해 몇 해 전까지 대중 담론을 지배했던 “힐링” 콘텐츠는 이런 시스템의 폐해에 따른 반작용이었다. 2015년을 전후로 힐링 담론이 퇴조하고 이를 대신해 금수저와 흙수저를 대비시키는 “수저론”이 등장한 건 대중이 느끼는 정서적 고통이 개인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과 구조적 원인에 대한 조망과 근본적 해결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은 집단적 성찰의 결과로 읽을 수 있다.

앞으로 한국 사회가 겪을 갈등을 예측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2016년 여름 발생한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을 계기로 크게 부상한 “여혐”(여성 혐오) 문제는 그해 10월부터 블랙홀처럼 다른 모든 이슈를 모두 빨아들인 최순실 게이트 덕에 잠복하였지만, 언제든 다시 첨예한 갈등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함께 군대 내 동성애 색출 논란으로 불거져 최근 대통령 선거에서까지 주요 이슈가 된 동성애, 동성혼 문제도 한국 사회가 곧 맞닥뜨리게 될 갈등의 중심에 성(gender)이 있음을 예고한다.

이주민의 급증으로 나타나는 문화적 이질성의 극복 역시 한국 사회가 만나게 될 새로운 갈등 요소다.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다문화 정책과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낮은 감수성으로 이런 갈등을 얼마나 잘 관리해 낼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주자를 양산하는 구조의 문제는 결국 탈북자를 비롯한 이주민 이슈가 계급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유럽에서 나타나는 인종 갈등과 난민 문제가 증명하는 바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더구나 한국에선 아직 낯설 뿐 아니라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한 이슬람이 연결되어 있어 그 갈등의 차원을 더 복잡하게 한다.

이런 잠재적 갈등 요소에 한국 교회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다시 상징 영역에 드러난 개신교의 모습을 통해 예측해 보면, 한국 교회는 이 이슈들이 만들어갈 갈등의 가장 한복판에 설 가능성이 매우 크다. 성 정체성 문제 그리고 이슬람이 개입되는 인종, 민족 문제에서 한국 교회의 위치는 매우 분명한 것으로 인식된다. 언론은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정치권에서 논의되어 온 “차별금지법”의 입법이 번번이 무산된 원인으로 예외 없이 “보수 기독교계의 반발”을 꼽는다.

한국 교회가 화평케 하는 자로 서기 위한 제언

이렇게 본격화하는 갈등의 시대에 한국 교회가 화평케 하는 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위에서 언급한 각 쟁점에 관한 신학적인 탐구와 논의가 치열하게 선행되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각각의 논란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지를 토론해야 한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상징 영역에서 어떤 존재로 규정되어 왔는가에 관심을 두고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 과정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며 다음과 같은 제언 두 가지를 한다.

첫째, 한국 교회가 갈등 조정자로서 역할을 하기 위하여 가장 시급한 것은 신뢰 회복이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시행한 ‘2017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 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20.2%에 불과하고,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51.2%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 10명 중 2명만 개신교를 신뢰한다는 것인데, 이는 가톨릭과 불교에 비해 크게 뒤지는 수치다. 대중은 신뢰받지 못하는 자에게 갈등의 조정을 맡기지 않는다. 신뢰가 없는 집단에 화평케 하는 역할이 주어질 리 만무하다.

상징 영역에서 개신교는 근본주의적이고 교조적인 집단으로 재현되며, 이는 신뢰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실 복음이라는 절대적 진리를 세상살이에 적용하는 방식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건 필연적이다. 범(汎)복음주의의 신학적 순수성을 유지하면서도 국가와 교회를 보는 관점, 사회적 쟁점들에 접근하는 관점에는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건강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다름”에 대한 인정과 포용은 대중들에게 보이는 개신교의 모습을 크게 바꿀 수 있다.

다른 문화에 대해 폐쇄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역시 필요하다. 이는 사실 “언어”의 문제다.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한국 교회에 선행되어야 할 건 “세상 언어”에 대한 이해와 학습이다. 세상이 사용하는 언어의 문법을 익히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를 향한 세상의 소리를 듣고 해석할 뿐 아니라 교회의 언어를 그 세상의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이웃과 소통해야 한다. 이는 개신교를 규정하는 딱지 중 하나인 “배타성”의 탈피와도 연결된다. 한국 교회는 세속 사회의 규범으로 굳어져 가는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절실하다. 갈등의 시대에 겸손과 관용은 우월한 가치일 수밖에 없다.

둘째, 복음이 말하는 탈물질주의적 삶의 방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필자는 이것이 신뢰 회복을 위해 한국 교회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주의, 배금주의 시대가 만든 절망에 신음하는 한국 사회는 이를 대신할 대안(alternatives)을 애타게 찾고 있다. 종교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저널리즘 미디어는 그 비판의 근거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종교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 비판에는 종교가 현시대를 지배하는 주류적 가치의 실패를 대신할 대안적 가치의 근원으로서 기능해 주기를 바라는 세속 사회의 기대가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그 대안적 가치는 탈물질주의가 되어야 한다. 물질적 자원의 한계와 분배의 공정성이 갈등현상 대부분의 근본 원인이라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취급할 수 없다.

초대교회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수 있었고, 나아가 “구원받는 자”의 수를 더할 수 있었던 원인은 탈물질주의적 공동체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사도행전 2:43~47).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교회에 울림이 매우 크다. 교회가 추구해야 할 “다름”의 핵심에는 이런 가치가 자리한다.

세상의 소리를 듣는 한국 교회

상징 영역에 관한 관심으로 한국 교회를 바라보면 이웃과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소통은 세상의 목소리를 듣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교회를 향한 세상의 목소리는 공공성과 공공 영역에 관한 관심과 참여를 촉구한다. 개인 구원에만 머물러 있다고 여겨지는 한국 교회가 사회 문제와 구조적 쟁점에 더 많은 참여를 해 주기 기대한다. 이는 흡연, 음주 등 개인적 윤리에만 소리를 높이다 정작 세상의 부정의와 구조적 악에는 묵인, 방조, 동조, 나아가 적극적 가담으로 이어지는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신학적 보수성과 정치 사회적 보수성 사이의 분리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우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이사야 1:17)라는 말씀, 즉 약자를 향한 삶을 요구하는 복음이 현재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또 앞으로 당면할 제반 갈등에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물론, 상징 영역을 중시하는 관점은 절대적일 수 없다. 교회를 향한 “이웃”의 시선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우리가 이웃을 향해 나아갈 때 중요하게 다뤄야 할 영역임은 틀림없지만, 세상의 목소리가 교회의 변혁을 결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목소리가 내적 갱신을 위한 교회의 노력과 겹친다면, 세상과의 소통을 고민하는 한국 교회를 위해 매우 유용한 방향 제시가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박진규 교수
서울여자대학교 언론영상학부

LID Leadership Journal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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