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Equipping Leaders Korean 탕자의 비유를 통한 전인성 회복의 길

탕자의 비유를 통한 전인성 회복의 길

By No Kwon Park

Stock holding hands 72px

“탕자의 비유에 담겨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는 인간 내면의 심리적 모습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탕자의 모습과 맏아들의 성실한 모습 뒤에 있는 이기심과 독선적인 모습 모두 우리 안에 있는 피할 수 없는 모습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만일 이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는 이런 나의 모습에 실망과 좌절을 느끼거나 남에게 투사하여 남을 정죄하는 모습을 지니므로 성숙한 통합의 인격을 갖는데 어려움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비록 완전하지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주는 것처럼, 우리 안에도 두 아들의 모습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 둘을 수용하는 그것이 성숙에 이르는 길임을 이 비유는 말해준다.”

최근 많은 사람이 온전한 전인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의 무의식 세계에 관하여 아는 것도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깊은 인간 내면을 성찰하기 위한 이러한 노력은 융의 심리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융은 무의식과 의식이 서로 만나지 않는다면 영혼의 아픔이 있을 것이고, 이 둘이 만나질 때 자아실현이 이루어지고 참된 행복을 찾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인 건강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처럼 의식과 무의식의 만남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성서는 이러한 전인 건강을 위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성서에는 인류의 보편적인 삶의 내용을 보여주는, 즉 인류가 오랫동안 경험해온 영적이고 정신적인 가치관을 포함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담고 있는 원형적인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영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층을 깊이 분석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준다.

따라서 최근 성서 이야기를 심리학 관점에서 해석하는 작업이 많이 이루어지는데, 여기에서는 탕자의 비유를 가지고 융의 심리학 관점에서 분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예수의 잘 알려진 비유의 하나인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11~32)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감동을 주고 삶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을 주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고도 생각되지만, 이 비유를 심층 심리학의 관점에서 조금 더 분석한다면 우리 인간이 지향해야 할 전인성 회복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제공한다. 따라서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아들을 인격의 두 부분인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상징이라고 보고, 아버지는 인격의 중심인 자기(Self)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는 융의 심리학적 관점에서 이 비유가 어떻게 전인성 회복에로의 길을 보여주는지를 풀어가고자 한다.

먼저, 둘째 아들은 무의식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무의식의 어둡고 통제되지 않은 에너지를 둘째 아들에게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형처럼 사는 것이 메마르고 재미없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욕구를 따라 나름대로 자아실현을 해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는 놀기 좋아하고, 경솔하고, 감각을 쫓는 쾌락주의자로 나타난다. 그는 받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소비했는데, “먼 나라”는 무의식의 깊이에 대한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빠졌던 “허랑방탕한 삶”은 본능적이고 세속적인 정신 에너지에 대해 억제가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둘째 아들은 인격화된 에로스로, 그 안에는 로고스와 이성이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무의식이 의식과의 균형이 깨진 채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비유에서 보듯이 무의식이며 억제되지 않은 둘째 아들은 점점 위기를 직면한다. 그의 에너지는 소모되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전혀 없게 되고, 친구들도 그를 버렸다. 그러나 이 위기는 그에게 정신이 들게 하고 그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였고 그를 집과 개성화의 상징인 그의 아버지에게 향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도 그는 열등한 동기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즉 굶주림과 보호처가 동기가 되었다. 에로스로 채워진 그의 생각은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누가복음 15:17)라는 것이었고, 그가 마음으로 준비한 고백은 종의 일을 부탁하고 음식과 숙소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에로스로 채워진 탕자는 결국 열등한 것으로 나타난다. 음식이나 옷을 살 돈도 없고, 돼지들 속에서 일하고, 매우 궁핍한 것으로 보인다. 나름대로 자기실현을 추구하고자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 욕구는 삶의 에너지이기 때문에 이 욕구를 억압하면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거나 삶에 흥미를 잃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욕구에 정직하고 조절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아버지 안에서 이루게 된다. 즉 이러한 아들에게 아버지가 베푸는 축하연도 에로스—좋은 옷들, 반지, 음악 그리고 잔치—로 가득한데, 이제 이 둘째 아들이 참여하는 에로스는 더는 파괴적이거나 열등하지 않고 성화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 즉 자기(Self) 안에서 더욱 큰 통합에로의 길을 가게 된다.

그리고 이 비유에서 맏아들은 정신의 의식적인 부분을 대표한다. 무엇보다 그는 둘째보다 나이가 더 많았는데, 이것은 특권, 우월, 권위의 위치에 있는 것을 말한다. 정신의 우세한 외향적인 기능인 의식과 유사하게, 맏아들은 한 집안과 사회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사회가 기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맏아들은 이러한 기능을 잘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맏아들은 남성적이고 양(陽)의 모습을 지닌다. 그는 진실하게 일하며 태양의 에너지, 즉 의식의 에너지를 받는 밭에서 이마에 땀을 흘리며 열심히 살아간다. 그는 에로스인 둘째 아들과 달리 합리적이고,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적합한 로고스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축하하는 잔치를 열어줄 때, 맏아들은 바로 그 합리적인 근거 위에서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맏아들은 그가 아버지를 위해 노력했던 여러 해 동안 자기를 위해 새끼 염소 한 마리도 잡지 않았던 것과, 그리고 지금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쓰고 돌아온 둘째에게 잔치를 열어주는 것에 대해 공정치 못하다고 불평한다. 이때 아버지는 로고스의 언어를 사용하여, 왜 둘째를 환영해야만 하는지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누가복음 15:31~32). 그러나 맏아들은 동생의 방탕이나 아버지의 인색하지 않은 후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이 [당신의] 아들”(누가복음 15:30)이라고 동생을 언급하면서 그와의 어떤 관계도 비난한다. 의식은 두려움의 느낌을 가지고 무의식의 에로스를 구별하고 차별하고 거리를 둔다.

그러나 맏아들이 거부하는 에로스는 그 자신의 그림자로, 자신의 의식에서부터 억압된 부분이다. 맏아들은 특히 아버지의 돈을 창녀와 써버린 동생을 비난한다. 이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형이 비난하는 것처럼 그런 곳에 돈을 썼다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집에 머무르며 에로스 없이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역할을 하며 살던 맏아들이 동생의 자유분방한 방식을 종종 상상했고, 마음의 비밀스러운 곳에서는 똑같은 욕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페르소나(persona)의 강요 때문에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때 그는 자기의 어두운 욕망을 그의 동생에게 투사하고 그를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생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자신의 어두운 욕망—그가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성공적으로 감추고 거부해왔던—을 의식하는 것이고, 이는 지속적이고 고통스러운 두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전적인 투사와 반응 공식의 예를 보게 된다.

“내가 바로 둘째 아들이었고, 맏아들이었으며, 이제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개성화를 이루어가려는 자기(Self)라고 할 수 있다. 융에게 있어서, 인간 발달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실현에 이르게 하는 개성화의 길이다. 여기서 자기는 의식의 법칙이나 무의식의 본능에 의해 제한되지 않고 독특한 정체성과 그 자체의 판단을 한다. 이것은 자기가 사회와 문화의 규범에 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더 고상한 목적을 가지고 그것들을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버지의 독특한 행위에서 이런 모습을 본다. 그는 아들에게 그의 재산의 몫을 갖도록 허락하는데, 이것은 당시 그의 공동체에서 경멸하던 행위였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죽기 전에 그의 재산을 아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을 금지하였고, 아들이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고 선포하는 것과 같았다. 이것은 아버지 자신이 “약하고 수치스러운 겁쟁이 아버지”로 간주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분명히 나이가 많은 아버지는 사회의 관습을 초월했고 그의 사랑 때문에 바보라 놀림당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아들을 받아준 것이다.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를 수용한다. 에로스이면서 합리적인 것보다 감각적인 것(무의식의 전형적인 모습)을 더 잘 이해하는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논리나 이성으로 상대하지 않고, 감각적인 잔치를 명하면서 아들의 수치와 상처를 치유한다. 로고스이며 감각적인 것보다는 논리적인 것(의식의 전형적 모습)을 더 잘 이해하는 맏아들에게, 아버지는 왜 그가 잔치를 베풀어야 하는지 논리적인 추론을 가지고 상대한다. 즉 세상을 보는 각자의 스타일을 지지하고 인정한다. 그는 두 아들이 모두 특별한 존재 스타일을 초월하도록, 그리고 서로가 공감적으로 연결되도록, 그리하여 서로의 관점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초청한다.

예를 들어 만약 사람이 이성에 고착되어 합리성에 깊이 빠지면, 이러한 상태는 일방적인 태도를 만들고 사람들을 삶의 활력으로부터 막아버릴 수 있다. 이것은 맏아들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 사람이 리비도(libido)에 빠지게 되면 에로스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자기만족에 따라 사는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둘째 아들의 인격 안에서 명백히 보인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이 두 아들 사이에 있으면서 조화와 균형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것은 개성화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가 로고스와 에로스,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에 있으면서, 에로스와 로고스를 통합하고 초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유에 대한 이러한 심리학적 접근이 우리에게 어떠한 유익을 줄 수 있는가? 무엇보다 탕자의 비유에 담겨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는 인간 내면의 심리적 모습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탕자의 모습과 맏아들의 성실한 모습 뒤에 있는 이기심과 독선적인 모습 모두 우리 안에 있는 피할 수 없는 모습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만일 이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는 이런 나의 모습에 실망과 좌절을 느끼거나 남에게 투사하여 남을 정죄하는 모습을 지니므로 성숙한 통합의 인격을 갖는데 어려움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비록 완전하지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주는 것처럼, 우리 안에도 두 아들의 모습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 둘을 수용하는 그것이 성숙에 이르는 길임을 이 비유는 말해준다.

사실 우리는 종종 주변에서 성실한 사람이라고 인정받던 사람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서 충격을 받는 경우가 있다. 또는 성스럽게 살려는 성직자에게 성적인 충동은 가장 무서운 죄책감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기도 한다. 이것은 형의 내면에는 동생의 모습과 같은 인격이 있고, 반대로 동생과 같은 성향의 사람에게는 형과 같은 성향이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형이 동생을 혐오스럽게 여긴 것처럼, 동생의 자아는 자신의 그림자를 혐오스럽게 여기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이 가장 싫어한 모습이기에 그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극단적이고 비판적이며 때론 공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형이 자신의 내면에 동생과 같은 인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동생에게 투사하는 것을 멈추고 내면세계와의 통합을 이룬다. 그러므로 자아 콤플렉스 이면에 그것과 정반대되는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전인성을 회복하는 길로 갈 수 있는 기초를 놓게 되는 것이다.

또 한편 나 자신을 올바로 인식하고 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새로운 차원으로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 의식과 무의식을 받아주어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처럼 이 비유는 우리에게 성숙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한다. 헨리 나우웬의 “내가 바로 둘째 아들이었고, 맏아들이었으며, 이제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라는 말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두 아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품어주고 통합하는 아버지도 자신 안에 있음을 깨닫고 이 아버지를 통해 개성화를 향한 길을 간다고 말한 것이다. 기독교적인 정신 치료는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스럽고 조각난 과거를 수용하고 용서하고 통합하고, 기쁘게 운명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것인데, 이 비유는 아버지의 역할을 통해 그런 과정을 잘 보여준다. 맏아들의 질투나 독선적인 모습을 비판하지 않고, 또한 둘째 아들의 방탕한 모습을 비판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끌어안고 보다 높은 단계로 이끌어간 아버지처럼, 우리 역시 우리 안의 이러한 모습들을 스스로 수용하고 성숙을 향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이 비유는 아버지가 이해하고 수용하고 양극단의 모습과 소외된 것을 통합하려고 했던 것처럼, 상담자(목회자)는 진정한 변화를 위해 내담자가 어디 있든지 그의 요구를 충족해주고, 무조건적 사랑과 배려를 하고, 온전함을 향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함을 보여준다. 비유 안의 아버지가 에로스를 통하여 둘째 아들과 관계를 맺고, 로고스를 통해 맏아들과 관계하는 것처럼, 내담자 안에 다양한 모습이 있음을 인식하고, 적절하게 내담자의 내면을 해석하고 돌보아 줄 수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처럼 이 비유는 상담자나 목회자가 사람들을 이해하고 치료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통찰력 또한 제공한다.

박노권 교수 Ph.D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목회와 상담 교수
LID Leadership Journal 2020

Contact Us for Help

View staff by program area to ask for additional assistance.

Related


Subscribe

* indicates required

Please confirm that you want to receive email from us.

You can unsubscribe at any time by clicking the link in the footer of our emails. For information about our privacy practices, please read our Privacy Policy page.

We use Mailchimp as our marketing platform. By clicking below to subscribe, you acknowledge that your information will be transferred to Mailchimp for processing. Learn more about Mailchimp's privacy practices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