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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교회와 이야기 신학

BY HANNAH HWA-YOUNG CHONG

우리는 누구의 이야기를 하면서 신학을 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Stock hands holding open bible

들어가는 말

이야기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성경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태초에”라는 창세기의 첫 말은 성경을 시작하는 구절이자 또 하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말이다. “옛날 옛적에”라는 말만 들어도 이는 옛날이야기의 시작임을 어린이들이 알듯이, 우리 신앙의 자녀들은 “태초에”라는 첫 말을 들으면 이 이야기가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이야기임을 안다. 성경의 여러 이야기를 듣고 또 듣고, 읽고 또 읽으며, 우리는 그 이야기에 친숙해지고,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삶을 보게 되며,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기도 한다.

이야기가 없는 기독교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앙은 이론을 믿는 것이 아니다. 추상적으로 마냥 초월적인 존재가 이 세상에 존재하리라는 것을 믿는 것도 아니다. 잘살기 위한 논리도 아니고 천국을 가기 위한 도구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사실의 진위를 떠나서 진실이며 공동체의 삶 속에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야기 신학의 대가인 대만 신학자 송천성은 “이야기는 꿈이고, 꿈은 이야기이다”[1]라고 말한다. 그는 이야기란 옛것과 새것을 연결하고, 과거를 현재로 만들어 준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민 교회에서의 이야기의 힘과 역할은 무엇일까? 어떻게 우리의 이야기가 꿈이 되고, 우리의 꿈이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이 글은 이민 교회에서의 이야기 신학의 역할에 대한 고찰이다. 우선 이야기 신학의 방법을 먼저 검토하고, 이민 이야기에서 성서의 새로운 맥락을 간략히 잡아본 후, 이민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 신학의 가능성을 검토한다.

이야기 신학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소위 성경에 잘못이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inerrancy of the Bible)은 성경을 이야기가 아닌 역사로 오해하여 생긴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란 정말로 사건이 일어났느냐 아니냐를 중요시한다. 성경은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그래서 이야기 신학에서는 인간 창조의 이야기가 창세기 1장에서 여성, 남성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쓰여있는 기록과 2장에서 여성이 남성의 갈비뼈에서 만들어졌다고 쓰인 기록 중 무엇이 맞는 사실이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이 두 이야기 모두에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역사하시는가를 본다. 출애굽 사건에서는 어떻게 바닷물이 갈라졌는지를 가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백성을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예수의 부활이 정말 육신의 부활이며, 그것이 과학, 의학적으로 가능한가를 문제 삼지 않으며 부활의 사건을 통해 인류의 구원을 뜻하시는 하나님을 보고자 한다. 이것이 이야기 신학의 방법이다.

신학의 힘은 삶의 이야기로부터 나온다. 우리의 신앙고백이란 이 성서의 이야기들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들이 현재의 나, 오늘날 우리의 삶을 변혁하고 새롭게 다지면 구원을 가져다주는 힘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의 모든 내용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철저한 기독교 신자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신학이 바뀐다. 하나님을 심판자로 보면 정죄의 신학이 나올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화해자로 보면 용서의 신학이 나온다. 하나님을 해방자로 보면, 아픈 자와 함께 고통받고 눈물을 흘리는 연대의 신학이 나온다. 해방 신학에서는 모든 불의와 억압에서 해방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흑인 신학은 인종차별로 고난받고 있는 가운데 눌린 자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한다. 여성 신학은 가부장 제도와 남성우월주의에 의해 고통받는 여성의 입장에서 성서를 읽고 하나님을 이해하며, 남녀평등의 새 공동체를 꿈꾼다. 이 신학들은 모두 이야기 신학의 방법론을 어느 정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민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어떤 하나님의 이야기가 이민공동체의 독특한 경험에서 어떻게 전해질 수 있는 것일까?

성서와 이민 이야기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이민 혹은 이주의 경험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이해하는 데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점은 이민 신학의 토대를 이룬다. Donald Senior는 성경 이야기의 중심은 이민 이야기라고 하며, 특히 구약의 흐름을 사로잡는 중요한 이야기를 아브라함의 소명 이야기,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 전쟁 패배로 인한 추방 이야기, 디아스포라로서의 삶의 이야기, 그리고 귀향의 이야기 이 다섯 가지로 꼽는다. [2]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모두 이민이나 이주 이야기다.

성서의 이민 이야기는 데라가 아들 아브라함과 전 가족을 고향인 우르를 떠나 새로운 장소 하란에 안착하면서 시작한다. 그 후 다시 하나님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는 말을 아브라함에게 하고, 그 말에 아브라함이 따르며 가나안으로의 이동이 다시 시작된다. 그 후 출애굽 사건은 다시 한번 큰 삶의 변화를 일으키고, 모세와 그를 따르던 자들은 이집트의 노예살이를 떠나 광야에서의 방황의 삶을 시작한다. 성서에는 출애굽이 한 번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시간을 두고 점차 이루어지며 가나인 사람들과도 점진적으로 교류가 일어난 것으로 보기도 한다.[3] 그리하여 출애굽은 억압받고, 가난하고, 힘겨운 노예의 삶을 사는 백성을 구출하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북 왕국이 아시리아에 점령되고, 남 왕국이 바빌론에 멸망되자, 이스라엘 민족은 모든 것을 잃고 새로운 땅으로 옮기게 된다. 디아스포라(흩어진 사람들, diaspora, dispersed people, dispersion)라는 새로운 아이덴티티가 생기게 된다. 그 후 다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긴 하였으나, 모두 돌아간 것은 아니고 이미 타인종과 결혼도 많이 진행된 상태에서 나라 없이 고향을 잃은 사람들인 디아스포라의 삶은 계속된다.[4]

신약에서도 이주의 삶은 계속된다. 복음서에서는 집 없는 예수의 이야기가 많이 있다. 예수의 탄생 자체가 안정된 집, 고향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예수의 탄생은 마태, 누가, 요한 복음서에 달리 쓰여있는데, 누가복음은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가 집을 떠나 인구 등록을 하는 여정 중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준다. 마태복음은 예수 탄생 직후 헤롯 왕의 폭정을 피해 전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2년 후 이집트에서 돌아와서도 탄생지이자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못 가고, 나사렛으로 정착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는 인간으로서 삶을 시작하자마자 이주/이민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사역 기간 집이 없이 이곳저곳 다니며 가르침과 치유 사역을 한다.[5]

이정용은 예수의 성육신 자체가 하늘에서 땅으로 이주하신 하나님의 이민 이야기라고 하며, “예수도 아시안 아메리칸처럼 이민자로서의 좌절과 고통을 겪으셨다”고 한다.[6] 예수의 신으로부터 인간으로의 이민은 그 어느 이민 경험보다도 더 오해와 불신이 깊었기에 예수가 이민자들의 고통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관복음에서 보이는 예수의 삶은 어쩌면 집을 잃음(homelessness)에서 시작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homecoming)으로 마감된다고 볼 수도 있다. 성육신을 통해 본래의 집을 잃고 이 땅에서 집 없는 자로 살다가 부활과 승천을 통해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야기가 이민공동체에 어떤 희망을 줄 수 있을까? Navone은 예수에게서 귀향이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새로운 미래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7] 이민자들의 귀향, homecoming도 마냥 지난 과거나 떠나온 지역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희망의 미래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이야기의 인물로 살면서 돌아갈 고향은 하나님의 집이다. 모든 기독교인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감을 인생 여정의 마감으로 생각하겠지만, 이민자들은 그 여정이 더욱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렇기에 집 없는 예수의 모습이 이민자들의 희망일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삶의 이야기는 기독인들에게 하나님-이웃-자아 관계의 새 패러다임을 형성한다” [8]라고 John Navone은 말한다. 더 좁혀서 예수의 이야기가 이민공동체에 새 패러다임을 줄 수 있고, 우리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구약과 신약에서 보이는 이민 이야기는 이민의 체험이 하나님 이야기의 큰 핵심임을 말해준다.

이민 이야기로 새롭게 만드는 신학

이정용은 “신학은 자서전적이나 자서전이 아니다”(Theology is autobiographical, but it is not an autobiography.)라고 한다.[9] 이 말은 기본적으로 신학이란 하나님의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를 접하고 전하는 이야기꾼의 삶이 항상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학은 자서전적인 요소가 강하고, 우리의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을 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민 공동체에서 이야기는 무척 중요하다. 이민자들은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이민 온 첫날의 날짜, 날씨, 입고 있던 옷 등 아주 상세한 부분까지 잘 기억하는 편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민의 시작이 삶의 큰 변화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과 더불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정용이 말하는 마지널리티(Marginality)는 주변성으로 번역되기도 하나, 원작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국말인 “가장자리”가 더 어울린다. 이민 사회에서의 마지널리티는 단순히 중심의 옆에 있는 주변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주류사회에 속할 수 없이 중심에서 배제되어있는 가장자리를 말한다. 어쩌면 맨 끝일 수도 있는 가장 변두리의 삶을 말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 상승하기가 힘들고, 풀타임 파트타임으로 직장을 둔, 심지어는 세 가지 다른 일을 해도 계속 가난한 삶, 지위와 힘이 없어 무시당하고, 그래서 희망도 없어 보이는 삶이다. 의료보험이 없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고, 법적 신분이 없어 불의를 당해도 법원에 갈 수 없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이 경찰에 신고할 수 없는 삶이 가장자리의 삶이다. 소위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 없는 신분으로 언제고 추방될 수 있다는 불안까지 안고 살아가고, 위조된 주민증으로 일하고 세금도 내지만, 그 세금의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는 가장자리의 삶에서 나오는 한의 이야기들을 이민 교회가 품어 줄 수 있을까?

집을 떠나는 사람들은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거나, 혹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떠난다. 많은 고민과 기도 끝에 이주의 결정을 내린다. Navone는 “모든 여정은 문제, 질문, 혹은 위기에서 시작한다”[10]라고 한다. 이주나 이민이 그 문제를 꼭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더 커질 수도 있다. 더 어려운 가장자리의 삶으로 내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가장자리의 이야기들이 나누어질 때 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우리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투투 주교가 널리 보급한 아프리카의 우분투 (Ubuntu)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결국 다른 이들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다른 이들이 있음을 말한다. 이는 공동체의 삶, 그 누구도 혼자 살지 않는 삶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 함께 산다는 것은 단순한 공존(co-existence)이 아니고 내존(inter-existence)이다. 인간의 삶은 개인의 존재(being)만이 아니고 상호 내존(mutual inter-being)이기에 내 안에 우리가 있고 우리 안에 내가 있으며 내 안에 다른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 안에 내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정용의 신학에서 말하는 “나”는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의 자아가 아니라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는 나,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나를 말한다. 이는 바로 상호 내존의 자아다. 가장자리와 가장자리가 만날 때 새로운 중심이 생긴다. 이정용은 이를 창조적 중심이라 한다.[11] 이민 교회는 이 창조적 중심에 서서, 주변인이 중심인으로 끊임없이 변화해 갈 수 있도록 보조하고 이끌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로 승화될 수 있다.

이민 교회의 이야기를 통해 새롭게 하는 신학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첫째, 이민 교회는 소외된 삶의 아픔과 상처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열린 장이다. 둘째, 이민 이야기를 통해 분열된 삶을 연결해주기를 소망한다. 미국과 한국의 삶이 연결되고, 우리 민족의 숙제인 남과 북의 통일의 꿈이 나누어지며, 약한 자의 이야기가 들려지고, 그동안 많이 가려져 있던 여성의 지도력을 키워줄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셋째, 이민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건설하기를 희망한다. 이민은 단지 부정적인 경험이 아니다. 예수님이 성육신을 하여 이 땅에 큰 선물로써 오셨듯이, 이민자들은 이민한 곳에 새로운 힘이 되어준다. 새로운 언어문화 등을 바탕으로 다양성을 안겨다 준다. 이민공동체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이민의 이야기에 새 힘을 주며 이민 교회는 새로운 신학 이야기를 써나가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교회가 변혁할 수 있다. 어떻게 새롭게 힘이 되는 변혁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지가 우리 이민 교회의 숙제다. 좋은 목회자는 새로운 희망을 주는 이야기를 만드는 지도자(narrative leadership)라고 한다.[12] 그런 이야기의 지도력을 이민 교회에서 기대해 본다.

마치는 말

이야기 신학은 살아있는 신학이다. 이야기 신학은 고여서 한군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항시 흐르는 물처럼 항상 새롭게 변한다. 인간의 경험과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다. 이민 교회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참 많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의 이야기를 하면서 신학을 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한인교회의 이민 신학은 한국의 신학과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에는 없는 이야기를 이민 사회가 품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주류 신학과도 다르다. 우리의 독특한 이야기를 신학화하여,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이민 교회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 흩어져 사는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가장자리 삶의 이야기가 담긴 신학이 앞으로의 이민 신학이 되리라 기대하며 우리의 이야기가 공동체의 꿈이 되고 우리의 꿈이 공동체의 이야기가 되는 신학을 소망한다.

정화영 목사 [email protected]
Community UMC 담임목사, 게렛신학대학원 Affiliate Faculty, Ph.D
LID Leadership Journal 2016


[1] C.S. Song, In the Beginning Were Stories, Not Texts (Eugene, OR: Cascade Books, 2011), 2.

[2] Donald Senior, “Beloved Aliens and Exiles,” in A Promised Land, A Perilous Journey: Theological Perspectives on Migration, eds. Daniel G. Groody and Gioacchino Campese (Notre Dame, Indiana: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2008), 22.

[3] Ibid., 21.

[4] Ibid.

[5] Ibid., 22-23.

[6] Jung Young Lee, Marginality: The Key to Multicultural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83.

[7] John Navone S.J., The Jesus Story: Our Life as Story in Christ (Collegeville, MN: The Liturgical Press), 166-167.

[8] Ibid., 141.

[9] Lee, Ibid., 7.

[10] Navone S.J., Ibid., 76.

[11] Lee, Ibid., 98.

[12] N. Graham Standish, “Pastor as Narrative Leader” in Living Our Story: Narrative Leadership and Congregational Culture, ed. Larry A. Golemon (Herndon, VA: The Alban Institute, 2010),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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