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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의 새로운 패러다임

BY HANNAH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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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 교회에서 교사 회의가 있을 때의 일이다. 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 딸아이를 데리고 회의에 참석했다. 딸아이와 함께 회의 장소에 도착한 지 몇 분이 지나, 전체 행정을 맡은 부장 선생님이 회의 진행을 시작했다. 지난 학기를 돌아보고 다음 학기를 계획하는 회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옆에서 혼자 놀던 아이가 갑자기 내 팔을 툭툭 치면서 묻는다. “Mom, aren’t you the leader of this group?” 아이의 이런 직관적인 질문에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이렇게 묻는 아이의 마음이 이해되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당연한 의문이다. 그동안 예배나 성경공부 혹은 세미나나 목자 훈련을 인도하는 제 엄마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있어서 이 모임 또한 내가 주관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주위에 계신 선생님들을 가리키며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속삭여 주었다. “Yes, I am their pastor and spiritual leader. She is the administrative director. That lady over there is in charge of AV. The teacher next to her is the worship leader. And the next person is the leader in charge of teachers’ training. The person at the corner is the music leader…” 나의 대답을 듣던 딸이 이렇게 반응한다. “Oh, I get it. So everyone is a leader here. I thought there could be only one leader for each group.”

Kurt Lewin은 리더십의 스타일을 ①권위적 독재형, ②민주적 참여형, ③방임적 위임형으로 정리한 바 있다.[1] 과거 오랫동안 권위적 독재형이 지배적이었다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20세기 중후반에 걸쳐서는 권위적 독재형에 민주적 참여형과 방임적 위임형이 함께 접목되어 표현되는 리더십 형태의 변화가 있었다. Robert Greenleaf는 섬기는 지도자 (Servant Leadership: A Journey into the Nature of Legitimate Power and Greatness)란 저서에서 섬김의 지도력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21세기에 들어선 연합감리교회의 새로운 지도자 상이 바로 디아코니아, 섬기는 지도자(servant leadership, diakonia)이며, 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도 그 뜻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개체교회, 지방회, 연회, 총회에 이르는 연합감리교단의 위계적인 큰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위임을 통한 민주적 참여라는 운영방식은 섬기는 지도자라는 새 포도주를 넉넉히 담아내기에는 너무 정형화되어버린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장점도 있다. 예수가 위탁한 “가서 제자 삼으라”는 선교적 사명을 시간이나 물질의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이런 위계적인 구조가 훨씬 효과적이고 결과도 빨리 가져다준다. 그렇기 때문에, 개체교회들은 여전히 그 조직과 운영에 있어 목회자 혹은 부서장들이 더 많은 책임과 권위를 가진 상의하달식의 지도력(top-down leadership)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지도자(leader)와 지도자를 따르는 무리(followers)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위계적 구조(hierarchical structure) 사상이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이런 지금의 현실을 비평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예수가 몸소 실천한 “섬기는 지도자”의 상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해 보자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혁(transformation)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성서, 신학, 철학적 고찰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 비평적 성찰을 통해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그 안에서 요구되는 “섬기는 지도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실천적인 변혁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섬기는 지도자”라는 이상은 21세기라는 시대의 사조로만 이해할 때에는 이론으로 남을 수밖에 없지만, 예수가 제시하고 몸소 살아낸 지도자상이라는 성서적 근거를 찾아볼 때 그 가능성을 열어준다. 예수는 마가복음 10장에서 자신이 살아내고자 하는 지도자상으로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모습이 아니라, “섬기는 자”이며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예수의 지도자상은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으로 살아야 한다는 원리를 제시했으며, “하나님과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2]를 가진 지도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지도자란 위에서 군림하는 지배자(lord and tyrant “over”)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스스로 낮추고 그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함으로 신앙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틀을 제공해 주었다. 다시 말해, 주변 사람을 섬기고 심지어 그들을 위해 종이 되기로 고백하는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헌신 된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룰 때, 그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지도력은 위계적(hierarchical)인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의하달이 아닌, 서로 섬기는 모습을 지닐 수 있다.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섬기는 종”이 되라는 예수의 바람은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서신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바울의 인간관과 교회론이 잘 정리된 고린도전서 12장에 따르면,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은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보완해 주고 지탱해 주는 수평적(horizontal)인 관계로 표현된다. “그리스도의 한 몸”을 구성하는 각 지체의 은사와 직분과 사역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어떤 지체도 다른 지체보다 우위를 점하는 위계적 서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평등한 존재임을 밝힌다. 그러한 수평적인 관계로 인해 각 지체는 서로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몸을 “고르게” 하사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다”라고 증거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각 지체들에게 주신 은사는 서로 돌보고, 그 은사를 함께 나누어 섬기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물론,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서 바울이 사용한 “리더십”이라는 단어가 “다스림”이란 위계적인 의미를 다소 내포하고 있지만,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적인 권력 행사로써의 리더십이 아닌, 공동체를 섬기는 데 사용되는 리더십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3] 따라서 성서가 제시하는 신앙 공동체의 이상은 모든 구성원이 수평적 관계를 하고 있고, 그 수평적 관계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섬기는 예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아 서로 돌봐야 하는 “섬기는 지도자”의 역할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에 의한 성서적 지도자상을 토대로 교회론(ecclesiology)을 논한다면, 교회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은 “다양한 은사로 서로 빚진 자(the mutually and multifariously indebted self)”라고 표현 할 수 있다. 그리고 서로 빚진 자들이 함께 이루는 교회는 더는 이끄는 이와 따르는 무리, 권위/능력 있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 강자와 약자,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라는 지배와 종속(domination and subordination)적인 고정된 이원적 위계 구조(hierarchical binary)의 틀을 벗어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다원적인 협력의 관계를 갖게 된다. 그리고 교회를 다원적인 협력관계를 가진 각기 다른 지체들이 이루어내는 신앙 공동체로 보기 위해서는 “지도력”에 대한 논의의 집중보다는 각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서로 빚져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력은 신앙 공동체에 속한 모든 구성원의 다양한 인격을 인정하고, 그 다양성 속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통일된 선교적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부족한 면을 채워주고, 돌보고, 격려하고, 사랑할 수 있는 섬김의 자세이다.

기능적으로 빚진 관계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들이 각기 다른 은사를 골고루 가지고 제 역할을 감당할 때, 온전한 신앙 공동체로 기능할 수 있다.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과 귀가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이듯,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은 서로가 감당하고 있는 역할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서로 빚진 사람들이다. 바울이 주장하듯 하나님은 같은 성령 안에서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어, 어떤 이는 사도로, 어떤 이는 선지자로,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능력을 행하는 자로, 어떤 이는 병 고치고 서로 돕고 다스리는 일을 하게 하셨다. 따라서 은사나 리더십이 어떻게 사용되든지 간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서로가 감당하는 역할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하나의 신앙 공동체로 온전히 기능할 수 없다.[4]

이 글 첫머리에서 나눈 사역의 이야기에 빗대어 설명한다면, 나와 함께 교사로 섬기는 동역자들은 그 사역을 찾아오는 아이들이나 보호자 없이는 각자의 지도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도자는 피지도자들에게 존재적/기능적으로 빚을 진 사람들이다. 즉, 우리는 모두 “함께”하지 않으면, 하나의 온전한 공동체로서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렇듯 우리는 서로 “함께”(being together) 함에 서로 같은 무게의 존재론적인 빚을 지고 있는 동시에 각자의 은사에 따라 서로 함께 “함에/섬김에”(doing/serving) 서로에게 같은 무게이지만 기능적으로 다른 빚을 지고 있는 관계이다. 그러기에 “다양한 모습으로 서로 빚진” 이들이 이루는 공동체는 일인/소수의 지도자가 피라미드형의 조직을 이끄는 위계 구조를 가질 수 없고, 서로 각자의 존재를 가지고 다양한 역량을 펼치며 우리의 공동체를 함께 지탱하는 관계가 된다. 그중 어떤 이는 목회자로, 행정가로, 기술자로, 예술가 등으로 각자의 은사에 따라 예배를 인도하거나, 교육을 실행하거나, 피교육자와 교감하는 등 각기 다른 모습으로 지도력을 발휘하며 섬기는 것이다. 설사 우리에게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없어 보이는 아이나, 혹은 몸이 불편한 지체라 할지라도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여러 부분의 채워짐과 충만함이 서로를 충족해 줄 수도 있고, 서로의 성숙에도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존재”와 “역할”에 의지하여 서로에게 빚을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수평적인 관계를 갖는다.

이렇듯 신앙 공동체를 구성하는 이들을 “서로에게 빚진” 관계로 이해할 때, 우리의 관계는 위계적(hierarchical)이 아니라 수평적(horizontal)일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신앙 공동체에서의 지도자는 다스리는 지도자가 아니라 “섬기는 지도자”일 수밖에 없다. 서로에게 빚진 이들이 이루는 공동체에서의 섬기는 지도자의 모습은 여성 신학자이며 목회자였던 Letty M. Russell이 주창하는 여성적 리더십 모델로 더 구체화 될 수 있다. Russell의 여성적 리더십의 패러다임은 위계적 관계 안에서의 이끄는 지도자가 아니라, 구성원들을 동역자/동반자(partnership)로 여김으로써 권력과 권위(power and authority)를 다른 이들과 나누어 이행하는 것을 권장한다. 섬기는 지도자는 교회 안에서 모든 구성원이 각자 주체성을 가지고 섬기는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격려하고, 힘을 실어 줌으로써 가부장적, 위계적 구조(patriarchal, hierarchical structure)가 아닌 원형적 구조(circular structure)를 형성하여, 구성원들 간의 연결과 친밀함을 불러일으키며, 유연함과 지속적인 열정을 야기한다.[5] 그러한 섬기는 지도자가 있는 곳에 섬김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원형적 구조의 나눔의 리더십(shared leadership)은 권위와 권력을 나눔으로써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주체성을 실어주며, 그 주체성은 책임감뿐 아니라 섬김의 지속성과 보람을 가져다준다. 그렇기 때문에, 나눔과 섬김의 리더십이 있는 공동체는 명령과 의무가 아닌, 서로가 함께 도와주고, 서로가 함께 세워져 가는 진정한 유기적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변화된 세상에서 다양한 삶의 변화를 겪으며 살아간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마음이 변화하고, 우리의 육체가 변화하며, 우리의 삶의 자리도 변화한다. 안정도 있고 위기도 있으며, 발전도 있고 정체도 있다. 다양한 배움과 체험을 통해 삶을 알아가게 되고, 그 삶을 행복하게 영위하기 위해 각자의 능력과 소질을 다각적으로 배양해 간다. 그렇게 형성된 사람의 인격은 다양하며, 다양한 인격체는 자기만의 지성, 감성, 영성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가진 인격체임에도 불구하고, 삶의 질을 판단하는 사회의 기준은 언제나 경제적인 잣대를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지성도 경제력에 물려 있고, 정치, 예술, 체육, 심지어 종교도 모두 경제적인 기준에 의해 판단 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한 인격체의 전인성(wholeness)을 너무 한 가지 잣대로만 가늠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입었기에 각기 표현하는 양상은 달라도, 다양한 하나님의 창조성(creativity)과 섬기는 지도자(servant leadership)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러기에 성령의 은사로 표현되는 리더십의 다양성은 섬기는 지도자들이 인식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이다. 다시 말해 한 가지 잣대가 아닌 각 사람의 은사에 따라 모든 사람은 지도자로 섬길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해야 한다. 이러한 존중은 리더십의 공유(shared leadership)를 통해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 줄 수 있는 섬김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 또한 부르심을 받은 교회의 사도로 살아가는 21세기의 모든 지도자는 서로의 다양한 지도력을 나누어 사용하는(shared leadership) 섬기는 지도자(servant leadership)가 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력은 생산적인 조직 운영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에 속한 모든 구성원의 다양한 인격을 인정하고, 그 다양성 속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통일된 선교적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서로의 부족한 면을 서로를 통해 채워주고, 함께 돌보고, 격려하고, 사랑할 수 있는 섬김의 자세이다.

노자의 도덕경 제17장에 있는 말이다.
“가장 좋은 지도자는 있는지도 모르겠는 자이며,
그 다음은 부모같고 기림받는 자이고,
그 다음은 두려운 자이며,
그 다음은 업신여겨지는 자이다.
믿음이 부족하면,
믿음을 얻지 못할 뿐이다.
넉넉하구나, 그 말을 아낌이여,
일이 잘 풀리면 백성들은 모두 자기가 한 것이라 말한다.”[6]

지도자의 진정한 표본은 가르치고, 이끌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섬김의 도리를 다하며 다른 이들의 지도력을 믿어 주고, 가지고 있는 권한과 책임을 나누어 주며, 무엇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지도자이다. 그런 지도자와 함께 무슨 사역을 했을 때는 어느 한 사람만이 공적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고백이 드려질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셨고, 우리 모두가 함께해냈다.”

가한나 목사 Ph. D.
[email protected]
LID Leadership Journal 2015


[1] Kurt Lewin, R. Lippitt and R. K. White, “Patterns of aggressive behavior in experimentally created social climates,”Journal of Social Psychology, 10 (1939), 271-301.

[2] 빌립보서 2: 5-8.

[3] Letty M. Russell, Church in the Round: Feminist Interpretation of the Church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3), 55. Letty M. Russell은 바울이 “다스림”(leadership)을 지칭하는 말로 배를 조종한다는 의미의 희랍어 단어 “kybernesis” 사용(고전 12:28)을 인지하면서, 이 단어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데 있어서 인도자의 위치를 갖는다는 점에서 “권위/권력의 행사”라는 위계적인 의미도 다소 함축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4] Hannah Ka, “Respectful Grace and Graceful Respect: A Korean Feminist Ethic.” (PhD diss.,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 2011).

[5] Russell, 56-58 and 66-74.

[6] http://ko.wikisourc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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