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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정의와 사랑의 환대

By Stephe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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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정의’(racial justice)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이해와 더불어 인간 이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인간과 고립되어 있는,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어떤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하나님 자신도 ‘신격’(神格, deity) 안에서 상호 관계를 맺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 논제로써, 성부·성자·성령 하나님 사이에는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하나님이 ‘인격적인’(personal) 분이시라는 표현은 ‘추상적 본질’(abstract substance)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상호 내주하고 또한 상호 교제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성립된다. 다시 말해, 세 분 하나님은 서로를 배려하여 사귐을 갖는 친밀한 관계 속에서 활동하신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을 ‘환대’(hospitality)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즉, 성부 하나님은 ‘환대의 근원’이시고, 성자 예수님은 ‘환대의 표현’이시며, 성령 하나님은 ‘환대를 실행케 하는 능력’이시다. 이러한 환대의 본성을 배제하는 하나님 이해는 근본 잘못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질이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계가 본질을 구성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낯선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친히 낯선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이와 관련해서, 환대로써 상호 교제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도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다른 인간(혹은 이웃), 그리고 자연 만물과 삼중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관계적인 이해는 인간의 본질은 반드시 이 삼중 관계성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요청한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규명될 수 없고 반드시 관계성에 의해서만 규명될 수 있다. 즉,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인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자’(他者, the other)와 관계를 맺고 살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관계성이 인간의 존재성을 규명한다. 아무튼, 삼위일체 하나님은 상호 친밀한 관계 속에 ‘교제하시는 하나님’(Deus in communio) 이시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도 ‘교제하는 인간’(Homo in communio) 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교제는 반드시 ‘환대의 실행’(a practice of hospitality)을 통해서 드러나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죄로 인해 이 관계가 깨져버렸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 이웃, 자연 만물과 분리 혹은 고립되거나, 보다 부정적으로 상호 적대시하는—하나님께 대한 의도적인 불순종과 반역, 이웃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와 폭력, 자연 만물에 대한 무분별한 오용과 착취로 드러나는—비극적인 운명과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서 인종차별 혹은 인종혐오 문제가 발생한다. 다른 사람(인종)을 차별 (혐오)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본래적인 ‘죄성’(罪性, sinful nature)으로 인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영원히 해결 불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낯선 자’(stranger)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친히 낯선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친구가 되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던져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주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30~37)는 인종 정의가 환대의 관점에서 어떻게 세워질 수 있는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우선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유대인)를 외면하지 않았다(사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었다. 요한복음 4:9 참고,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니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그리고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런 후, 그에게 최선의 사랑을 베풀었다.

이렇게 긍휼의 마음을 품고 낯선 자에게 시선을 집중한 후(seeing with compassion), 가던 길을 멈추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며(stopping and approaching),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는(fully showing love) 모습은 환대가 어떻게 실행에 옮겨지는지 확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의 환대’(hospitality of love)로써 인종 정의를 든든히 세울 수 있다. 그것은 낯선 자들(다른 인종들)을 향한 사랑의 환대 안에는 인종 차별이나 혐오가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그 교회의 주요 구성원인 두 인종(유대인과 이방인) 간에 신학적인 이해의 차이로 발생한 갈등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로마 교회는 다수의 이방인 기독교인들(강자들)과 소수의 유대인 기독교인들(약자들)이 상호 비판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즉, 여전히 율법을 고수하려는 유대인들은 믿음을 강조하면서 제멋대로 방종하는 이방인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믿음 안에서 자유를 구가하는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고리타분하게 율법에 집착하는 유대인들을 전혀 용납할 수 없었다.

바울은 이 두 그룹을 향해 율법 지상주의와 믿음 지상주의 양자를 경계하면서 “너희도 서로 받으라”(Accept one another 로마서 15:7. 로마서 14:1 참고)고 권면하고 있다. 이 구절에 사용된 희랍어 동사, ‘프로스남바네인’(προσλαμβaνειν)은 ‘영접한다’(receive), ‘환영한다’(welcome)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랑의 환대로 서로 받아들이는 것을 갈등의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인종 차별과 혐오가 곳곳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특별히 이 땅에서 미국인들의 눈에 낯선 자들(소수 민족)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이 문제를 대처해 나가야 할지 막막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비록 약자들의 위치에 있지만, 패배 의식을 버리고 인종 정의를 위해 당당히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낯선 자에게 아낌없는 사랑의 환대를 베풀어야 할 것이다.

이광훈 목사 [email protected]
콜로니얼비치연합감리교회,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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