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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의 신학적 이해: 종교와 국가, 갈등과 화해, 인종과 소수자/이주자들의 삶을 21세기에 다시 묻다

By Eun-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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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관용은 상당히 어려운 주제이다. 관용이란 서로를 자유로운 자요 동등한 자로 인정하는 조건에서만 실제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자신의 고유한 전통이 지닌 어두운 측면을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개별화해서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물론 각 전통은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의 질문들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도대체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관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관용과 진리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왜냐하면 각 신자에게 신앙의 진리에 대해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관용의 지속적인 주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교가 일신교를 표방하는 종교라면 선천적으로 편협하고 배타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관용에 대한 사회의 물음에서 교회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관용에는 한계가 있는가? 사회는 얼마나 많은 다름과 차이를 견뎌낼 수 있는가? 더군다나 교회 안에서의 관용은 가장 위험한 것인데 우리가 ‘복음적’이라고 말할 때는 그 어떤 권위와 상관하지 않고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믿을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므로 이단과 사교(邪敎)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분명코 관용은 올바른 삶을 소개하는 하나의 양식으로서 다양성을 가공(加工)하는 것이다. 동시에 관용은 신자이면서 능동적인 시민이 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기에 결코 조현병이나 모순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관용은 신앙의 범주에 해당한다.

신앙은 일상과 사회를 벗어난 신비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으며 오히려 타자와의 관계와 사회생활 속에서 제대로 표현될 수 있다.

종교마다 관용과 불관용의 잠재력이 있다. 그 잠재력은 종교마다 그 크기가 다르다. 성서 역시 관용의 잠재력을 상당히 갖고 있지만, 그에 대한 의문은 언제나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가령 이집트학자인 얀 아스만(Jan Assmann)은 성서의 일신론이 배타적이고 심지어는 난폭하다고 고발했다. 성서의 하나님은 질투가 심하고 반대자를 3~4대까지 박해하며 모든 형상과 신상을 파괴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일신 사상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관용의 잠재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두 번째 계명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되거나 동일하지 않다는 것인데, 이는 우리의 인식이 그분께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불관용은 하나님의 초월성이 부정되고 인간이 하나님과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가질 수 있다고 간주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법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초월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다는 뜻이므로 성서 전체는 문제의 소지가 있는 개별적인 본문들에도 불구하고 관용에 대한 결정적인 노선을 제시해준다.

가령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마태복음 10:34)라는 예수님의 표현은 관용에 대해 기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지만,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복음 13:24 이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관용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기도 하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타협이 없었던 바울의 모습은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자를 다루는 대목은 그의 서신들 곳곳에서(특히 로마서 14장) 드러난다. “사랑은 모든 것을 관대히 취급하지만,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것도 인내하지 않는다.” 물론 성서가 지닌 관용의 잠재력이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언제나 촉진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국가 종교로 탈바꿈하고 중세의 교회가 진리에 대한 독점권을 차지하고 난 후부터 그리스도교에 대한 공공연한 특징을 불관용으로 간주해온 것도 사실이다. 공식적인 교회가 보여준 불관용에 맞섰던 지루한 갈등의 역사는 비로소 종교 개혁을 통해서 매우 본질적인 인식을 가져다주었다. 즉 교회와 국가의 제도적인 불관용에 대한 결정적인 대질(對質) 장소는 양심이라는 것이다. 근대의 시민전쟁과 계몽주의는 이를 심화시켰으며 모든 시민은 교파(敎派) 혹은 종파(宗派)와 무관하게 동등하며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주었다. 이제 개신교의 중심 업무는 신앙, 양심, 종교, 견해의 자유를 비롯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법 앞에서 모든 인간이 동일하다는 것을 규정하는 일이다.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종교의 공적인 기능을 다음의 두 가지에서 찾고 있다. 하나는 종교가 문화적인 가치 기준의 그물망을 제시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외형적인 형식 절차를 밟도록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세속화된 헌법 질서 내에서 정치적인 의사소통 과정을 위한 잠재성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이 짐승일 수 있다는 사실(factum brutum)에 직면해서 이런 공적인 기능을 종교적인 다양성으로 감당할 수 있다. 이때 종교적인 다양성이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다양성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삼중적인 성찰을 실행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첫째, 다른 종파들이나 종교들과 불협화음의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종교적인 인식을 준비해야 한다. 둘째, 이때 종교적인 인식은 학문적인 권위에 맞추어져야 한다. 셋째, 더 나아가 종교적인 인식은 세속적인 도덕으로 정당화되는 입헌 국가의 전제에 대응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관용의 정신은 이제는 헌법적인 명령이라기보다는 시민적인 덕목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관용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를 밝혀보자. 사람들은 관용(tolerate)이라는 용어를 다양하게 받아들인다. 문자적으로 관용은 ‘참고 견디다, 감내하다’인데, 이런 방식은 수동적이고 빈약한 관용을 뜻하게 된다. 비록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방식이나 신념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견딜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럴 때 타인과의 접촉이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표명하지 않게 된다. 반면에 오늘날처럼 다종교적이고 다문화적인 사회에서 인간다우며 평화적으로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관용이 필요하다. 즉 마지못한 감수보다는 상호 간의 존중이 요청된다. 타자의 견해와 관점, 신앙 그리고 생활양식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평화로운 사회를 세우는 적극적인 태도이며 이를 위해 대화를 요구하고 적극적으로 진리를 위한 논쟁을 회피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관용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를 위해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인들은 관용적이어야 하는가? 왜 그리스도인들은 관용적일 수 있으며, 어떻게 관용적이어야만 하는가?

이제 몇 가지를 언급하자면 첫째,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자신을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관용으로부터 산다. 루터는 라틴어 tolerantia를 ‘인내’로 번역한 바 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피조물이다. 둘째, 관용은 진리의 문제를 배제하지 않는다. 진리와 관용 사이의 긴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자는 진리가 없다거나 혹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진리 자체는 하나님 편에 속한 것이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진리에 다가가려고 하는 것이다. 셋째, 관용은 대화 가운데 있다. 우리의 지식은 ‘미완(불완전)의 상태’이며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의 신앙보다 크기 때문에 다른 종교들과 세계관을 배제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사도행전 17:27). 하나님이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은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인간의 태도에 대해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이다. 이런 기대 가운데 진리를 향한 물음을 포함해서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화의 목적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획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더 잘 이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이해를 올바르게 발견하려는 것이다. 인격적인 체험이야말로 진정한 만남이다. 진리는 대화 가운데서 발생한다. 설령 진리의 문제로 투쟁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격적인 대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갈등 문화가 첨예하게 드러난 시기에 상호 간의 존중과 진심 어린 대화는 신앙 양식과 생활방식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넷째, 관용은 자기 자신을 분명하게 확신하는 곳에서 성공한다. 타자를 위협으로 체험한다면 어떻게 다른 방식이 가능하겠는가? 확고한 자기 가치 의식(자긍심)을 소유하는 곳에서만 견딜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타자를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느낌이 확실해야 한다. 고유한 문화적인 정체성을 어느 정도 확신하는 자만이 타자를 수용할 수 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려주는 고유한 전통을 알아야만 한다. 다른 이들과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관용은 그들이 누군지 혹은 그들이 누가 아닌지를 알고 있는 상대에게 속하는 것이다. 자신의 특징과 한계를 인식하고 있는 타자만이 대화의 상대가 된다. 다섯째, 관용은 지나치게 부당한 요구를 허용하지 않는다. 타자 혹은 다른 입장이 낯선 것으로 남아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써야 하는가? 낯선 것이 매력을 끌지 못할 때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아무것이 없다는 사실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그럽지 못하다거나 배타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서 한정적이다. 그러므로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낯선 것과 타자는 우리를 윤택하게도 하지만, 그것을 감내하기 위해서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 관용은 모든 것을 멋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뎌야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관용은 때로 다른 것이 낯선 것으로 남아있도록 하고 그럼에도 그것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여섯째, 관용은 한계를 갖는다. 할례나 강제 결혼, 피의 복수처럼 지금도 제한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전통적인 문화에 해당하는 일을 다루려 할 때 이를 용인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문화적인 가치가 인권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사유와 행동이 타인의 삶과 가치를 위협하거나 강요하는 곳에서 관용은 그 한계를 갖는다. 불관용은 불화와 폭력의 온상이지만, 그런 불관용을 인내하는 것 역시 관용을 궁지로 몰아넣는 것이며, 관용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불관용에 맞서 그 어떤 관용을 베풀지 말라”는 말은 교회가 모든 형태의 불관용에 대해 저항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더는 교회 안에서 근본주의가 거주권을 행사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진리를 홀로 소유하고 있다는 신념은 교만인 동시에 분열과 상처만을 불러일으킨다. 근본주의자들은 다른 가치 질서의 대변자들과 투쟁하는데 결코 시민적인 수단을 쓰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먼저 공공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단지 공적인 교회만이 관용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사적인 일’이라는 말은 종교적인 신념의 문제가 개인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는 사적인 일이 결코 아니다.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 관용을 위한 전제는 교류와 의사소통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사적인 일로 치부되는 한, 관용은 터전을 잃게 될 것이다. 교회는 결코 희귀 동식물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공적이고 여론에 해당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세례를 주기 위해서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은 멈추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교회의 신앙을 만날 수 있을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 신앙은 일상과 사회를 벗어난 신비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으며 오히려 타자와의 관계와 사회생활 속에서 제대로 표현될 수 있다. 신앙이 성서적이고 복음적인지를 가늠하는 자리는 더불어 사는 관계 가운데서 바르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 관용도 표현되는 것이다. 교회는 다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임의적이지는 않다. 무한정 유연하다는 말이 결코 관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식 가능한 고유함이 있어야만 관용에 해당한다. 우리가 사회라는 광장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정체성을 드러낼 때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종교이든 간에 근본주의는 관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어떻게 보면 근본주의는 현대에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강력하게 성장하는 하나의 신앙 노선이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종교적인 행실의 부활이라기보다는 미래에 강력한 역할을 하게 될 하나의 현상이다. 근본주의는 관용과 개인주의를 신앙과 연결하려는 모든 종교의 신앙 양식을 위협하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의 영적인 태도는 참된 신자들을 근원으로 돌이키려고 힘썼던 과거를 현재가 배신하고 있다는 표상에 근거한다. 그들은 성서를 통해서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태도의 개방성을 경멸하도록 정당화한다. 사회제도와 공공기관에 반대하고 국가에 대해 의심하며 소그룹을 통해 개인적인 경험과 급진적인 결단을 촉구한다. 그런데 근본주의자들은 전통적인 교회들보다 훨씬 현대적이기도 하다. 즉 국제적인 접촉과 교류, 공동의 관심사와 정보의 교환을 인터넷을 통해서 구축하기 때문이다. 어떻든지 교회가 다양하면서도 특성을 부여하려면 근본주의에 저항하고 맞설 수 있어야 한다. 폭력이나 강요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말이다.

지금 우리는 가벼운 신앙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학문은 신앙을 배제하고, 가능한 모든 것을 믿는 세계가 구축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출산율이 저하함으로써 2060년에는 인구에 있어서 이슬람이 최대종교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제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시장은 날로 증가추세이다. 종교를 다루는 출판문화의 상당수가 영성, 신비, 처세에 관한 것들이다. 영적인 빈곤의 허기를 채우려는 시도는 요가, 명상, 점성술, 풍수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며, 가히 영지주의의 전성기를 보는 듯 퓨전이라는 짜깁기 신앙(patchwork)을 주저하지 않는다. 소속이 없는 신앙은 공공성을 상실한 신학과 다를 바 없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법과 권한을 갖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신학이란 모름지기 공동체의 일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교회는 신학의 도움과 지원이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신학이 목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야 실천에 유용하게 되는 것이다.

관용이라는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그리스도교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그리스도교에 지워진 짐을 가볍게 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누구도 관용을 무시하거나 반대할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은 평화로운 공생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있다. 우리는 진리의 문제를 배제할 수 없어서 종종 사회에서 불편한 동료들을 접하게 될 때 언제나 누구든지 사랑한다고 친근감을 표시할 수는 없다. 신앙과 종교를 정직하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다루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일반적인 가치 교육은 종교 교육보다 훨씬 쉽다. 매일 쇼핑하는 것이 주일의 안식을 준수하는 것보다 편하며, 다양한 이론과 정보를 접하는 것이 교리를 배우고 익히며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간단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앞으로 세계관을 둘러싼 갈등에 직면할 경우가 훨씬 농후하다. 단지 종교 간의 분열 때문이 아니라, 반-종교적이고 반-성직자 저항 운동이 더욱 거세질 전망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종교와 그 생활 양식을 공적인 영역에서 몰아내려는 행동이 전개될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종교도 괴롭히거나 폐를 끼치지 않는 자유야말로 종교의 자유라고 말할 때가 머지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반-종교적인 불관용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전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신앙은 불쾌하고, 종교는 어려우며, 교회는 신경질 나는 시대, 그래서 종교적으로 무관심하며 동시에 종교적으로 문맹인 일상 의식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시대에 관용을 말한다는 것은 조화와 일치를 강제하려는 시도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관용에 대해 길고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그 길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가려는 시도는 바라지 않을 것이다. 진리의 문제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사회의 공공성을 지향해야 하는 과제는 교회를 불편하게 하는 동시에 살아있기에 여전히 감당해야 할 과제이다.

다시 한번 묻자. 그리스도인들은 관용적이어야 하는가? 왜 그리스도인들은 관용적일 수 있으며, 어떻게 관용적이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한 매우 중요한 논거는 하나님의 관용에 대한 유비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모든 창조는 그 무엇인가를 자신의 곁에 유지하도록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낸다.” 하나님의 관용은 죄의 타락 이후에도 입증되었다. 성서는 시종일관 우리가 관용에 관해 숙고하기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관용을 받은 자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 자신만이 하나님으로부터 관용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면 하나님이 타자를 관용하실 때 어떻게 우리가 이 일을 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이웃 사랑이 뒤따르며 이웃 사랑으로부터 신중함이 뒤따르고 신중함으로부터 관용이 뒤따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관용을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죄인의 의(義)라는 빛에서 해석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 부과되었던 불관용이라는 문제는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답변이 이루어질 수 있다. 첫째, 신앙 진리의 일부로써 사랑의 계명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의 방법과 신앙의 내용은 서로를 요구한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불관용 할 수 없다. 둘째,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인간이 지닌 인식의 오류와 유한성에 대한 통찰을 깨우쳐주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를 파악하고 붙들려는 인간의 능력보다 훨씬 크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하시며 그럼에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비밀”로 존재하신다. 이 사실을 고려한다면 관용이란 상대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앙의 입장과 이웃에 대한 인내는 결코 모순이 아니라, 상호 간에 의존한다. 관용은 교파, 종교, 세계관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와 대면하는 것이며 교제하고 대화하는 것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관용의 한계는 불관용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나의 관용은 너의 불관용에서 그 한계를 발견하게 된다. 자유의 권리가 상호성에 근거하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는 타자의 자유 안에서 한계를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관용은 본질에서 교육의 목표여야 한다. 관용이 악과 연계될 때 그것은 범죄가 된다. 우리는 현대의 제도 속에서 이런 문제에 봉착하곤 한다. 제도를 악용한 사례가 관용에도 해당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불관용이 불화와 폭력의 온상으로, 관용이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관용이 불관용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사회 질서는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불관용에 그 어떤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저 유명한 상투어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는 것”(갈라디아서 6:2)을 배우는 것이다.

이은재 교수 Dr. th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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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D Leadership Journal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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